무상급식, 반값 등록금 등 교육문제와 관련해 우리 사회가 시끄럽다. 억장이 무너질 황당하고 무식한 원론 이야기로 답해보자. ‘교육은 원하는 만큼 모두에게 그냥 공짜로 시키자.’ 어떻게? 무기 사지 말고, 공사 하지 말고, 교육비부터 먼저 책정해 놓고 그런 다음에 나머지 예산 책정하자. “왜? 교육은 인간이 사회관계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혜와 지식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에…”라고 통상의 가치로 말할 수 있다. 여전히 논란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이 나이를 저절로 먹듯이, 교육은 자연스럽게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라고 존재론적 관계(제도, 예산, 연구, 교수방법 등 교육 관련 일체를 한 묶음의 존재)로 말하면 어떨까. 교육을 성장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소리’로 받아들이자는 뜻이다.

요사이 등산을 하면서 종종 듣는 새소리가 있다. 네 박자 뽕짝뽕짝의 변형으로 우는데, 어릴 때 어렴풋이 들은 ‘노고지리’로 착각했다. 어느 날 고등학생 아들놈과 산을 오르다가 새소리가 어떻게 들리냐고 물었더니, “밥 주세요, 밥 주세요” 한다는 것이다. 한창 먹을 나이이니 그렇게 들리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지인의 지식을 전달받고 보니, 우는 소리는 ‘카, 카, 카, 코-’ 하는데, 앞의 3음절은 높이가 같고 마지막은 낮다. 봄 여름 가을까지 밤낮으로 우는 여름새로 ‘검은등뻐꾸기’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어느 스님이 게을러 공부하지 않다가(또는 어느 여인을 사모하다가) 죽은 후 새로 환생해 모든 상념과 잡념을 ‘홀딱 벗고’ 공부하여 해탈하라고 그리 운다고 한다. ‘홀딱 벗고’ ‘홀딱 벗고’… 애들은 ‘학교 가자, 학교 가자’로 들리고, 초발심이 일어나는 이에게는 ‘머리 깎고, 머리 깎고’로 들리는 소리다. 검은등뻐꾸기는 그냥 제 ‘소리’를 내며 울고 있을 뿐인데.

새소리를 각자의 처지나 선입견으로 듣는 것은 웃음을 자아내는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고, 삶의 고뇌나 진지함이 배어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먼저 소리를 소리로 듣고서야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교육을 ‘존재의 소리’로 듣자.

교육의 본질은 개인의 성공과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의 삶의 지혜라는 공공성이다. 따라서 교육은 경쟁과 배제가 아니라 소통과 배려, 환대와 협력을 통해 스스로 주체성을 확립하는 문화(삶의 방식), 자신을 성찰하고 타인을 인정하는 공존과 공감의 공동체적 문화(삶의 방식),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교육은 사회적으로 나이를 먹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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