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공공의 적’인 세상에서 어찌 자식을 기를까

10년 전 나의 꿈 중엔 늙어서 할머니가 되는 것이 있었다. 그냥 늙은 여자에게 주어지는 이름으로의 할머니가 아니었다. 딸들이 결혼해서 낳은 자식들로부터 할머니로 불리고 그 아이들을 돌보는 상상을 하면 마음이 따뜻해졌다. 늙은 뒤의 따뜻해지는 상상 중에 이것은 상상만으로 끝나지 않는 너무도 당연히 실현될 것이어서 반대의 경우는 예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딸들은 모두 ‘결혼’을 하고 싶어 한다.

세월이 흘러 자식들이 모두 서른을 넘겼다. 아직 이런저런 이유로 결혼하지 못했다. 결혼은 나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총체적 조건이 결정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할머니가 되고자 했던 내 꿈에도 변화가 생겼다. 우선 결혼이란 게 꼭 필요한가, 이런 생각이 든다. 거기다 아이를 낳는 게 태어날 생명에게 행운일까, 고민하게 한다. 인구가 줄자 당국에선 출산장려금을 준다느니 하는 정책을 내놓는데 그 내용이 새 발의 피거나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 같아서 좀 우습고 순진하게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우습지도 않고 더군다나 순진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우선 아기가 자랄 모태의 조건은 아마 여자로 태어나면서부터 성장할 텐데, 여러 가지 반생명적인 문화적 공격으로 성장은커녕 쇠약해질까 염려스럽다. 중·고교 여학생부터 청춘기의 여성까지 ‘바비인형’ 같은 몸매를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모든 매체들은 소녀들의 몸매를 선정적으로 보여주고 마른 몸매와 달리 가슴만은 확대수술로 키워놓아 부자연의 극대화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여성의 아름다움의 표상으로 각인되게 하고 중독시킨다. 이런 배후에는 ‘돈’과 ‘탐욕’이 미소 짓고 있을 것이다.  

사람이 자연현상에 적응하는 건 미개하고 저개발된 국가의 국민이나 하는 풍속 같아서 여름을 여름으로 살지 않고 겨울을 겨울로 살지 않는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니 그 토양과 기후 조건에 적응하며 튼튼해져야 할 것이다. 먹는 건 어떤가. 몸에 해로운 화학첨가제를 어떻게 넣고 그 넣은 흔적을 어떤 화학제품으로 교묘히 없앴는지, 이젠 맛이나 색으로는 구분할 수도 없게 그 방면의 과학이 발달했다. 식품만이 아니라 이미 물과 공기와 흙이 오염되어서 땅과 바다와 하늘에서 나는 먹을 것조차 믿을 수가 없다. 의학은 발달하는데 새로운 질병들은 그만큼 늘어난다.

이건 어떤가. 대부분 아파트라는 공동 주거환경에서 사는데 아이를 놀이터에서 놀게 한다. 아이는 혼자 놀 수 없다. 꼭 누군가 어른이 지켜주어야 한다. 어린이집이나 유아원에 보낼 수 있지만 그곳이 할머니에게 맡기고 마당에서 놀던 때처럼 평화로울진 미지수다. 

사람이 태어나서 생명 그 자체인 먹을 것을 염려하고 보금자리라는 집과 이웃이라는 주거공간을 의심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공공의 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사회에서 과연 어찌 자식을 기를까, 이게 요즘 나의 고민과 슬픔이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서민은 부부가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웬만한 셋집도 마련하기 어렵다. 이런 문화와 경제적 압박은 잠재적 분노를 길러 결국 선진국 중에 자살률이 가장 높은 국가가 되게끔 했다. 10대에서 30대까지, 그러니까 사춘기와 청춘기의 국민 사망 원인에 자살이 가장 높다니, 어찌 해야 옳을까. 아이를 낳게 하는 사회를 만드는 건 국가 운영 계획과 그 실천이 ‘평화로움’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평화는 극단적인 차별과 불균형, 탐욕의 지배로는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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