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드라마에 빠져 ‘저 여배우는 전생에 몇 번이나 나라를 구했기에 저 남자랑 키스신을 찍나’ 하며 내 전생을 탓하면서 중년의 아줌마가 되고 싶지는 않다.
마흔 살을 ‘불혹(不惑)의 나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 나이가 되면 정말 세상사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망설임이 없을 수 있을까 벌써부터 기대 반 우려 반으로 나의 40대를 그려본다. 예전에 어떤 선배의 꿈이 예쁘게 늙은 할머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참 꿈도 소박하다. 여자는 늙으면 다 할머니가 될 텐데 뭐 그런 게 꿈인가’ 싶었는데 그 앞에 붙은 ‘예쁜’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노후 준비가 삶의 커다란 과제인 요즘 제각기 다양한 재테크로 불안한 노후를 준비하고 있으니 나도 미래를 위해 뭔가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정한 목표가 ‘예쁘게 늙기’다(남의 꿈을 좀 베끼긴 했지만 출처를 밝혔으니 선배도 양해해 주리라 믿는다).
농촌에서 예쁘게 늙으려면 이탈리아 장인이 한땀 한땀 수놓은 꽃무늬 작렬인 ‘몸빼’ 바지를 입으면 되나? 아님 밭일 나갈 때 선크림을 듬뿍 발라 우유 빛깔 피부를 유지하면 되는 걸까? 도시에서는 중년의 나이에도 아랫배가 안 나온 착한 몸매에 바람직한 직업까지 있으면 ‘꽃중년’이라 불리며 늙어가면 될 것 같은데 이곳에서는 어떤 모습이 예뻐 보일지 도통 감이 잘 안 온다. 그래서 난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기로 했다. 내 주변에 ‘저 사람은 참 예쁘네’ ‘볼수록 매력적인 사람이네’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한참을 고민해 보니 몇몇 떠오르는 얼굴이 보인다. 그런데 그녀들이 입은 바지는 꽃무늬도 아니고, 햇볕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피부에 XXL 사이즈는 족히 넘을 것 같은 몸매다. 도무지 예쁜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데 왜 그녀들의 얼굴이 떠올랐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공통점을 찾을 수가 있었다.
정답은 바로 ‘부녀회장’이었다. 그녀들은 모두 부녀회장 출신(?)으로 농촌에서 절기별로 행해지는 각종 행사에서 항상 부엌을 꿰차고 진두지휘하며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행사 후에 사람들까지 챙기는 후덕함이 그 어떤 섹시, 발랄, 청순함보다도 그녀들을 예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도 ‘예쁘게 늙기’라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부녀회장을 꿈꿔보기로 했다.
50대면 청년 소리를 듣는 농촌 마을에서 부녀회장의 연령대는 50대 중반을 훨씬 웃돈다. 면민의 날 행사라도 할라치면 웃지 못할 상황을 볼 수 있다. 마을별로 점심을 준비하는데 70대 이후는 식사를 앉아서 받아먹고, 60대는 음식을 나르면서 식사를 때우고, 50대는 거의 식사를 못하고 계속 음식을 만드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니 40대에 부녀회장이 되는 일은 40대 대통령이 나오는 것만큼이나 획기적인 일일 것이다. 속된말로 그럴 군번이 아직 아니기 때문이다. 농촌 마을의 젊은 피 수혈 운운해 봐야 당신들 손자보다도 마을에서 적게 살았으니 잠시 실현 시기를 뒤로 미루는 게 좋겠다. 그렇다고 해도 불혹이 코앞이니 뭔가 새로운 미션을 찾던 중 ‘예쁘게 늙은 할머니’가 되기 전에 ‘예쁜 여자’가 되고 싶어졌다. 누구의 부인도, 누구누구의 엄마도 아닌 그냥 ‘여자’로 말이다.
20대만 해도 나는 여자이기보다는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받기를 원하며 여자라는 말에 과민반응을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여자라는 정체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일도 종종 생기게 되는 것 같다. 귀농인들을 중심으로 시작한 독서모임에서 얼마 전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라는 책을 선택해 토론을 한 적이 있다. 폐경기 이후 여성의 몸과 의식의 변화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 글을 읽으면서 경제적인 재테크가 아닌 마음의 재테크를 해둔 것 같아 든든한 기분이었다. 회사를 다니면 남녀가 동등한 역할을 하는 경우와는 달리 농사는 여성이 보조적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고, 집안일에 치중하다 보면 오히려 여자인 것이 자존감을 낮게 만들기도 한다. 더군다나 가부장적인 문화가 도시보다 많이 남아 있는 농촌에서 여자로서 행복함을 느끼는 일이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농촌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보기로 한만큼 이곳에서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으로 나이를 먹고 싶다. 그래서 나처럼 새로운 귀농인이 마을에 들어와 예쁜 사람을 떠올릴 때 내 얼굴이 떠오를 수 있도록 정말 잘 살고 싶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린다면 한 20년쯤 후에 부녀회장을 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여한이 없겠다. 붉은 악마가 말하지 않았던가, ‘꿈은 이루어진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