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마을에서 찾아낸 ‘느리게 살기’의 여유

이 ‘슬로 투어’의 시작에는 배경이 있다. 한국의 ‘여성환경연대’는 2005년부터 문화인류학자 쓰지 신이치가 주창하는 ‘슬로 라이프’(Slow Life)를 콘셉트로 대안생활 운동을 시작하면서 일본의 100만 인의 캔들나이트 실행위원회, 카페 슬로, 공정무역(Fare Trade) 숍 만들기 등을 하며 ‘나무늘보클럽’과의 네트워크를 지속했다. 나무늘보 클럽은 브라질을 오가며 공정무역 커피 사업을 하며, 카페 슬로를 운영하는 후쿠오카의 나카무라, 메이지학원대학 문화인류학·국제학부 교수인 쓰지 신이치, 그리고 호주의 환경 운동가이자 가수인 안자 라이트(Anja Light) 3인이 의기투합하여 1999년에 만든 모임이다. 이 클럽은 환경문화운동과 환경공생형 비즈니스를 확산시키는 환경 비영리단체(NPO)다. 이념과 경계를 넘어 자유롭고 다양한 개인들이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여성환경연대는 지난해 쓰지 신이치 교수의 ‘행복의 경제학’ 책이 출간될 때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 교수(연세대 사회학과)와의 만남(다시, 행복을 묻는다 : 조한혜정, 쓰지 신이치, 우석훈 대담)을 주최하게 됐다. 이 만남이 지속·확장되면서 한·일 양국의 문화인류학자 2인을 주축으로 규슈로의 슬로 여행이 기획됐다. 이번 슬로 투어의 목적은 나무늘보클럽과 연결된 개인들이 일본 규슈 지역에서 만들어가는 ‘슬로 마을’을 방문하여, 이를 통해 지속가능한 마을 만들기와 다양한 삶의 모델을 확인하고, 한국에서의 가능한 모델을 기획해보는 것이다. 또한 이 네트워크를 계기로 한·일 양국이 생명평화의 메시지를 함께 나누는 연대를 구성해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조한혜정 교수는 투어의 참가자들을 초대했고, 그녀가 맺고 있는 자유롭고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나무늘보클럽의 멤버들과 적극적으로 연결시키면서 느슨하지만, 언제라도 함께 동의하고 걸어갈 수 있는 만남을 구성했다. 다양한 전공의 교수들, 아티스트, 뮤지션, 한의사, 요가 선생, 요리 연구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2월 설 연휴 기간을 활용해 5박6일간 여행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우리의 긴 여정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우선 슬로 투어에서 핵심적인 마을인 유후인에서의 일정과 일본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소개를 하려고 한다. 나무늘보 클럽과 같은 개인 네트워크 중심의 활동 사례가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어, 여성신문 지면을 빌려 일본의 나무늘보클럽의 멤버들을 소개하고, 한국의 여성환경연대를 비롯한 다양한 생명, 평화, 환경 등의 단위들이 함께 참여하게 된 흐름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람 중심의 여행 지도를 가지고 ‘사람’을 만나러 가는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다.

첫날, 막 오키나와의 정기를 받고 후쿠오카로 날아온 하자센터의 두 멤버, 한국에서 도착한 14명의 멤버들과 후쿠오카 공항에서 일본의 나무늘보클럽(나마케모노 구락부)의 환대를 받으며 조우했다.

대합실과 갤러리를 겸한

유후인역 아트홀이 인상적

규슈에서 첫 저녁식사를 한 곳은 우리를 맞은 마을 청년의 가족이 운영하는 ‘캇포우 사토우’라는 식당이다. 사토우는 30대 청년인데, 유후인 마을에서 마차택시를 운영하며 가난하지만,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19세 때 도시적 삶에 대한 동경으로 도쿄로 유학 갔으나, 1년 동안 학비와 생활비만 탕진하고 부모님의 회유(?)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지금은 3남매의 아버지이자 유후인 마을의 마차택시 홍보대사로 마을에 젊은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몇 년 전, 그의 마차를 타본 적이 있는 관광객이 다시 유후인을 찾아 우리 일행과 서 있던 그를 알아보며 인사를 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낯선 이로부터 나의 존재를 확인할 때, 누군가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기억해주는 것에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더불어, 시간이 흘러도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사토 청년이 분명 반가웠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사지 않는 날과

‘지속가능한’ 나무젓가락

다시 휴대용 나무젓가락 이야기로 돌아오면, 대부분의 일본의 식당에서는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사용하는데, 남이 쓰던 젓가락을 공유하지 못하는 ‘까다로운 일본인’들로 인해 말레이시아 페낭의 숲이 점점 파괴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슬로 투어에서 꼭 챙겨야 할 것은 개인 휴대용 젓가락이었다. 한국에서 개인 젓가락을 준비해온 일행들에게 테리의 아내가 젓가락을 선물했다. 아기자기한 일본의 문양이 다양하게 프린트 된 천 속에 얌전하게 들어있는 색색깔의 나무젓가락은 용도의 씀씀이를 넘어서는 미학이 담겨있는 물건이었다. 매번 ‘귀차니즘’을 극복해야 하는 환경운동의 실천 영역을 미학적 관점에서 훌륭하게 소화해낸 이 젓가락은 6일간 여정의 끼니때마다 등장하여 그녀의 섬세함과 미적 감각을 떠올리게 했다.

음식 환대와 젓가락 미학에 취한 사이, 유후인에서 ‘슬로 마을 만들기’를 하고 있는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을 만났다. 우선 마을의 문지기라 할 수 있는 슈지 다이(Shuji Tai)를 소개하겠다. 그는 마을의 장년 세대로 유후인의 인포메이션센터장이다. 유후인은 매년 5월 문화 기록 영화제와 7월의 유후인 음악제로 유명한데, 그는 마을의 음악축제를 창립했다. 일본 내에서 매우 유명한 음악축제로 자리 잡은 이 클래식 음악제는 올해로 39회째 된다고 한다. 인구 1만 명의 유후인에 매년 500만 명이 이 음악제를 보러 온다니, 마을은 슈지 다이와 같은 음악과 문화를 사랑하는 자유분방한 문화 기획자가 꼭 필요한 법이다. 처음엔 유후인 시민들이 클래식을 듣지 않고, 엔카만 들었다고 한다. 그는 음악적 취향을 강요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여 무리하게 정착시키지 않으려 했다고. 그래서 음악축제가 정착되기까지 15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온 음악제는 이 마을 아이들이 성장하여 고향 유후인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하는 마을의 중요한 축제라고 한다. 저녁식사 후 숙소에 있는 세미나 룸에서 개최된 ‘슬로 디자인 워크숍’에도 참가했는데, 이는 유후인 마을에 설계될 ‘카페 슬로’에 관한 세미나였다. 일본 전국과 세계 각지에서 에코 건축에 관심을 갖고 몰려든 젊은이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슬로 디자인’은 건축가 고이치 오이와(쓰지 신이치 교수의 형)가 설계한 친환경 건축을 지칭하는 것으로, 스트로베일과 황토와 같이 자연에 해가 가지 않는 자재와 자연과 어우러지는 디자인이 콘셉트다. 저녁에 유후인 마을에 있는 소규모 펜션에 짐을 풀고, 뜨거운 노천 온천으로 슬로 투어를 위한 몸 풀기를 시작했다.

슬로 마을, 그 시작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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