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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문화예술기획(여문)의 이혜경(45) 대표를 만나기 위해 11월 10

일부터 ‘마요네즈’ 공연이 한창인 대학로의 ‘오늘·한강·마녀’

소극장을 찾았다. 80여 석의 소극장 좌석은 관객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어머니 신화’에 대한 허구를 생각하게 하는 연극이어서

인지 중년 주부들의 모습도 눈에 많이 띄였다. 공연이 끝난 후 관객

들과 갖는 토론시간에 관객들의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답하고 있는

이 대표의 모습에서 사람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열정을 느낄 수 있

었다. 토론이 끝나고 나서도 질문을 하는 학생에게 성실히 답변하고

돌아서는 이 대표를 만나 그의 문화운동과 살아가는 얘기를 들어보

았다.

-‘여문’을 처음 시작할 당시와 지금까지 해온 주요한 일들에 대

해 얘기해 주세요.

“평론가, 작가, 배우, 음악인 등 문화예술 방면의 전문가 17명이 모

여 92년 2월에 정식으로 여문을 만들었어요.‘여성의 눈으로 문화읽

기’를 시작한 거죠. 여문에서 처음 한 일은 ‘여성과 예술’이라는

강의였는데, 각 장르에 걸쳐 1년간 강의하며 토론을 했어요. 그해 여

름에 안동지방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그 과정중에 연극 ‘자기만의

방’이 탄생됐어요. ‘자기만의 방’은 92년 11월부터 8개월간 공연

을 했는데 5만명의 관객이 들었지요. 그 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아마조네스의 꿈’을 기획해 95년까지 공연했고, 96년말에

사단법인화해서 97년 봄에 ‘서울여성영화제’를 개최하고, 가을에

는 홍대 앞 극장 ‘마녀’ 운영을 시작했죠. 처음에 공포심야영화를

기획해 성황리에 마쳤어요. 지금은 극장을 옮겨 내년 1월 10일까지

‘마요네즈’를 공연하고 있어요.”

-문화운동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되셨어요?

“어려서부터 연극하고 노는 것을 좋아했고, 대학 다니면서도 그랬

어요.‘논다’는 것은 현실질서와는 다른‘환타지(환상)’를 갖는다

는 걸 의미하는데, 놀면서 현실에 대한 불만들을 표출하곤 했지요.

이화여대를 다닐 적에 문리대 연극반을 했는데, 기존의 연출가를 거

부하고 우리들이 연출하고 번역하고 창작극을 하고 그랬죠. 그러면

서 대학인으로서 우리가 연극을 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자각을 하

기 시작했어요.

그러는 중에 많은 남성 동료지식인들을 만나게 됐는데, 그 사람들의

남성중심성, 엘리트주의, 여성에 대한 비민주성 등을 느끼게 되었죠.

그래서 민족, 민중운동 등이 잘 되려면 진짜 여성운동이 잘 돼야겠

구나 하는 생각을 대학교때부터 했어요. 그러나 당시 70년대 중반에

는 여성운동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여성문화운동을 하겠다

는 사람들은 만나기 어려웠어요. 그후 대학에 여성학과가 생기고 체

계적으로 여성문제를 인식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80년대에는 문

화전문 인력들도 점차 여성문제를 자기문제로 받아들이게 됐고, 조

직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게 됐죠. 그래서 사람들을 하나, 둘 만나

고 다녔어요.”

-‘여성문화운동’을 해나가면서 어려웠던 점은?

“초기에는 여성문화운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동료들의 비웃

음, 그리고 사회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 자체가 어려웠죠. 여성

운동 내에서조차도 문화의 문제는 항상 선전, 선동의 도구로 인식됐

고, 결국은 궁극적으로 문화의 문제로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했어요. 그러나 여문을 시작할 90년대 즈음에

는 그런 문제들은 많이 없어졌어요. 여문을 시작해서 느끼는 어려움

은 아직도 연극 등 문화예술 영역이 대중들로부터 소외돼 있어서 아

무래도 ‘가난’의 문제는 필수적이라는 거죠. 게다가 경제적인 어

려움에도 불구하고 대중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만큼 많은 실험을

해야 된다는 것.

하지만 여성문화운동을 하며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기쁨

도 컸어요. 학문이 깊은 사람, 말 잘하는 사람, 매일매일 매맞는 여

자, 매매춘하는 여자... 우리가 만나는 방식은 우리들 나름의 아픔과

꿈 속에서 만난다는 거예요. 영화제 같은 큰 일을 벌였을 때 처음엔

엄두가 안 나지요. 그런데 다 힘을 합쳐서 해내거든요. 하는 사람들

이 열심히 하고, 또 관객들도 열렬히 환영하고. 우리에게 가장 큰 힘

이 되는 것은 같이 꿈을 꾸는 사람들의 열렬함이에요.”

-홍대 앞에 있던 ‘마녀’ 극장이 이곳 대학로로 옮겨진 후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요?

“오늘, 한강, 마녀 세 극단이 공동투자해서 대학로 이 소극장을 전

세로 얻었어요. 그래서 1년에 4개월씩 나눠서 쓰는데, 우리는 11월부

터 내년 2월까지 쓰게 돼 있어요. 극단 한강은 80년대부터 사회문제

에 관심이 많았던 극단이었고, 극단 오늘은 한강의 제 1세대들이에

요. 두 극단 모두 우리와 기본적인 생각이 통하고 유사점이 있어요.

그래서 일하는 데 어려움은 없고, 항상 ‘따로 또 같이’라는 생각

으로 하고 있죠.

우리가 처음 홍대 앞에서 극장 ‘마녀’를 시작할 때 ‘여성들의 문

화기지’, ‘젊은이들의 문화기지’를 표방했어요. 여성주의적 시각

을 갖는 것, 그리고 젊음이라는 것 자체가 기존 문화에 대한 대항과

대안이고 변화를 위한 틈새를 마련하는 것이거든요. 여성들만이 아

니라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 진보적인 주체들과 같이 하기

위해서였죠. 그래서 연극공연 외에 이전에 했던 ‘공포심야극장’의

연장선상에서 지금 ‘밤문화실험실, 마녀카바레’라는 것을 시작했

어요. 마녀가 기존 질서에 모반을 꿈꾸는 문화를 만들어 가며, 일상

의 억압과 분노를 푸는 놀이공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 있다면?

“아버지인 것 같아요. 엄마는 항상 뒤에 있어서 그 존재가 보이지

않았고, 아버지가 모든 걸 주도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멋있어 보였죠.

기독교 장로여서인지 아버지는 ‘남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줬고, 남에게 베푸는 삶을 강조하셨어요. 그러면서도 여유있게 살 수

있는 마음가짐을 배웠죠. 그리고 부정적으로 영향을 준 사람은 외할

머니라고할 수 있는데, 오빠에 대한 할머니의 편애 때문에 어려서부

터 남녀차별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어려선 어땠나요?

“모험심이 강하고, 놀 궁리만 했어요. 어려서 피터팬이 제일 되고

싶었어요. 피터팬은 자기가 가고 싶은 데를 마음대로 날아다니고 그

러잖아요. 세상에 대한 호기심, 탐험 그런 게 많은 편이었죠. 그리고

애들을 조직해서 연극하고 놀고 그러는 데 있어서는 대장이었죠. 모

범생 타입은 아니었어요.”

-어린시절 문화적인 경험을 들려주세요.

“그리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와 성악을 전공하

셨던 어머니 밑에서 문화적으로 많은 걸 향유하면서 자랐어요. 책이

많았고, 음악을 많이 듣고, 화집도 보고, 여행 경험도 많았고. 그래서

매일 연극을 하면서 놀 수 있었죠. 할아버지가 목사님이셔서 기독교

문화에서도 많이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크리스마스같은 때 여유롭

게 지내고...”

-남편분이‘운동하는 의사’로 들었는데요?

“‘인도주의의사실천협의회’등을 만들고 산업재해 문제에 관심갖

고 뛰고 있고, 참여연대 집행위원장도 맡고 있어요. 서울 의대를 다

니던 중 학생운동으로 제적을 당해 나중에 나와 독일로 유학을 갔다

와서 ‘성수의원’을 개업했죠.”

-남편과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대학 졸업 후 중학교 선생을 할 때 연극반 후배들이 자기들 써클

선배인 남편을 소개해 줬어요. 굉장히 엄격하면서 운동을 열심히 하

는 사람이었어요. 성격은 안 맞는 부분이 많았지만 진정성이 있고,

이상이 나와 맞았죠. 그리고 여성해방이 항상 궁극적이라고 말했는

데, 그게 자신의 엄마의 삶을 통해 보아온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어

요. 우리가 좋아했던 칼릴 지브란의 싯귀인 ‘부부는 하나의 신전을

받드는 두 개의 기둥’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결혼을 했어요.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라는 것, 각각의 자기 세계를 가지고 나란히 가자라

는 생각이었고, 지금도 그것은 지켜지고 있는 것 같아요.”

-자녀가 딸 둘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예. 큰애가 연세대중문과 1학년에 다니고 있고, 작은애는 초등학교

3학년이에요. 큰애는 중요한 시기에 같이 있고 해서 나한테 거의 불

만이 없고 믿음이 많은데, 작은애는 불만이 많아요. 같이 보낼 시간

이 없어서 아빠가 그부분을 많이 채워주죠. 전에는 왜 다른 엄마들

처럼 하지 않는지에 대한 불만, 그리고 자신은 현모양처가 되겠다,

남녀평등같은 거 그리 중요치 않다, 그런 생각을 가졌는데, 이제는

점점 학교에서 남녀관계의 부당함을 경험하면서 나에게 동조하는 말

들을 해요.”

-자녀들한테 바라는 게 있다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

어요. 그리고 항상 사람은 여럿이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야 된다고

얘기해요. 아이들이 비교적 자립적인데 그런 점은 참 다행인 거 같

아요.”

-문화운동에 대한 자부심에 대해 말해주세요.

“사실 어려서 문화적으로 여유있게 자란 게 오히려 많은 컴플렉스

였어요. 대학교때는 ‘민중컴플렉스’ 같은 게 많았어요. 문화는 여

유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 철없는 사람들이 하는 것 그런 의식이 있

었는데, 난 그런 게 좋고, 놀고 꿈꾸는 게 좋은 사람이었죠. 현실문

제와 부닥치는 게 어려서부터 그렇게 익숙한 사람이 아니고, ‘환

상’, ‘놀이’가 좋은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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