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음식 국적도 없어…다시 식생활 혁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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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문 정대웅 기자
“가계부 쓰기 운동과 저축 장려 운동을 한 10년 했나? 강산이 한번 바뀔 만큼의 세월이지. 내 생활과 함께 한 거야. 나도 역시 오랫동안 가계부를 썼고, 알뜰한 주부가 되기 위해서 가계부는 필수품이야. 가계부 잘 적은 사람에게 포상도 했어. 가계부 쓰기 운동에 도시뿐 아니라 농촌 주부들까지 참여하게 했지. 정말 열심히 했어.”

71년 국민포장 이어 특별상 등 상복 이어져

1960년 농촌진흥청 생활과장을 맡았던 현기순 교수는 농촌지역에도 가계부를 가져다주고 쓰는 요령까지 알려주었다. 67년 여성저축생활 중앙회 회장을 맡은 후로는 해마다 알뜰저축상, 그리고 생활수기 공모, 창의력 계발 공모 행사에서 직접 연설을 하고 시상도 하였다.

마침내 가계부 쓰기 운동과 여성 저축 운동은 그 성과를 인정받아 현 교수는 71년 4월17일에 박정희 대통령의 국민포장을 받게 되고, 75년에는 서울시 새마을부녀회 회장직을 맡았다.

포장증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귀하는 우리나라 경제분야 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대한민국 헌법 규정에 의하여 다음 포장을 수여함.”

이후 현 교수의 상복은 이어졌다. 국민포장에 이어서 75년 서울대학교와 웨슬리안대학교의 가정학 교류에 일익을 담당한 공로로 미국 오하이오주 웨슬리안대학에서 특별공로상을 받았다. 76년에는 재무장관의 표창을 받은 데 이어 77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기에 이른다.

여성 저축 운동은 아이들에게도 확산되어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어린이통장을 만들어 매달 일정 금액씩 저축을 하도록 장려했다. 초등생들은 1학년 때 통장을 만들면 6학년 졸업 때 저축금액이 제법 많이 불어나 저축금을 타는 재미도 쏠쏠하게 느끼게 되고, 그 돈으로 중학교 입학 때 교복을 구입하기도 했다.

“여성이 계획적인 생활을 해야 해. 술 좋아하고 기분파적인 대부분의 남자들은 계획적인 생활을 하기가 어려워. 여성이 똑똑해야 집안도 발전하고 나라도 발전해. 여자들은 싸우는 태세보다 다소곳이 얌전하게 낮은 자세로 생활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아. 잘난 척하면서 숫자 같은 것은 무시하고, 가계부 안쓰고 혼자 날뛰면 안되지. 시대가 변했지만 지금도 그런 자세가 필요한 것 같아.”

현 교수는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올리듯 오랜 경험에서 우러난 말을 전했다. 77년 서울시 교육위원을 맡아 여성교육 지침을 마련한 그로서는 어느 여성을 만나더라도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73년 정계 입문…11대 총선서 패배 ‘쓴맛’

교수생활과 여성운동, 그리고 존타클럽의 봉사활동을 왕성하게 하던 중에 현 교수는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바로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유정회(유신정우회) 회원이 되면서 현 교수는 10대 국회의원이 된다. 73년 2월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9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73명의 전국 선거구 의원들은 여당인 민주공화당에 합류하지 않고 3월10일 독자적으로 원내 교섭단체인 유신정우회를 구성했다.

유정회는 대통령 박정희의 지도이념을 입법활동에 구현함으로써 유신헌정 체제의 수호 및 발전을 위한 원내 전위대 역할을 주로 담당했다. 임기는 3년마다 한번씩 개편을 거듭하여 79년 3월 제3기까지 존속되다가, 10·26 박정희의 사망으로 그 존재 의의를 상실한 단체다. 80년 10월27일 제5공화국 헌법이 발표됨으로써 공식 해체됐다.

유정회의 몰락은 현 교수의 정치행보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혼인 후 며칠 만에 첫 남편을 잃으면서 시작된 현 교수의 파란만장한 삶은 교수가 된 후부터는 우여곡절 속에서도 사회적으로는 탄탄대로로 이어졌다. 하지만 정치에 손을 대면서 좌절을 맛보게 됐다. 국민당 중앙위원회 부의장과 국민당 고문을 맡으면서 정치활동을 하던 현 교수는 11대 국회의원 지역구 출마에서 패배를 했다.

그 와중에 미국에서 양어머니의 사망 소식까지 들려왔다. 미국의 양어머니는 사랑과 친절이 무엇인지 행동으로 알려준 사람이 아니던가. 특히 크리스마스 때마다 힘닿는 대로 음식을 만들고 손님을 초대하여 파티가 생활에 기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려준 사람이다. 현 교수는 양어머니에게 배운 대로 한국에 와서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조촐한 파티를 열고, 대가족들을 초청해 음식을 나누어 먹고 선물을 하면서 화기애애한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여 주위의 환영을 받곤 했다. 파티행사는 90세가 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손자, 손녀, 조카들까지 초청해 줄 수 있는 선물은 모두 나누어주곤 한다.

‘불행은 겹쳐 온다는 말이 틀리지 않는구나.’ 미국생활에서부터 사실상 정신적인 지주로 자리잡은 양어머니의 사망은 삶에 대해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현 교수는 더 이상 정치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82년 청소년복지회관 운영위원과 국제 존타 서울클럽 회장을 맡으면서 여성의 평등권 및 여성과 아동학대 예방에 관련한 국내외의 다양한 사회 봉사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존타클럽 한국대표로 국제회의에 참석해 연설하는 현 교수.cialis coupon cialis coupon cialis coupon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존타클럽 한국대표로 국제회의에 참석해 연설하는 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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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학교 돌아가 식생활 관련 저술활동 왕성

이런 현 교수에게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서울대 교수 자리는 유정회 국회의원이 되면서 그만두었지만 서울대는 명예교수의 자격기준을 다시 만들면서 정치활동을 접고 사회봉사를 활발히 하는 현 교수의 그간의 공로를 인정해 그를 명예교수로 영입하였다. 학교로 돌아온 현 교수는 조리학과 급식, 식생활에 대한 저술활동을 왕성하게 했다.

계량컵을 사용할 때도 미국과 한국의 다른 기준, 즉 미국이 한 컵에 240㏄라면 한국은 한 컵에 200㏄로 전혀 기준이 달라 혼동됐던 것을 십진법으로 계산하여 알아보기 쉽게 하였다. ‘단체급식’ ‘영양학’ ‘식생활 관리학’ ‘식단 작성’ ‘조리학’ 등 다양한 가정학 책들이 현 교수의 손을 거쳐 서점으로 쏟아졌다.

늦게 결혼한 남편은 한시라도 현 교수의 옆에서 떨어지기 싫어해 동아리 학술대회에도 함께 따라다녔다. 하지만 세월은 못 뛰어넘는지 97년 폐암으로 현 교수의 곁을 떠났다.

“내가 비행기를 탄 것이 백번도 더 넘어. 그 시대에는 참 그렇게 다니기가 어려웠지. 그렇지만 외국에서 학술대회나 행사가 있으면 휠체어를 타더라도 꼭 갔지. 미국, 일본, 중국, 유럽은 열번씩도 더 갔어. 베트남도 가봤고….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들어서 다 잊어버렸지만 느낌은 아직도 살아있어. 가고 싶어도 못간 곳은 아프리카뿐이야. 그런데 그렇게 많이 다닌 것이 견문을 넓힌 것 같아서 모두에게 권하고 싶어. 돈 너무 아까워하지 말고 마음을 키우는 데 투자했으면 좋겠어. 우리 때는 저축에 신경을 많이 썼지만 돈이 모으라고만 있는 게 아니야. 참 저축을 아는 사람은 쓸 줄도 알아. 여러 군데 다니면서 보고 느끼고 하는 데 투자하는 것은 바로 배우는 데 쓰는 것과 똑같아. 공부라고 책상에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잖아. 세계가 바로 배움터인데…. 많이 다니면서 그 나라의 장단점을 찾아내고, 또 우리나라의 장단점을 찾아냈으면 좋겠어.”

인도의 찻잔, 일본 인형, 중국 그림, 태국에서 산 장식물…. 현 교수는 여행 때마다 하나씩 사모아 집안 가득 진열한 장식물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역사와 삶의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흔적들이 현 교수의 곁을 지켜주고 있었다.

“음식을 음식으로 보면 안돼, 생명과 연관 있어”

“그런데 난 요즘 음식에 대해 불만이 많아. 음식에 국적도 없고 예의범절이 전혀 없어. 예의범절까지는 또 그렇다 쳐. 음식은 바로 중요한 에너지원인데 전혀 인식을 못하고 있어.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는 것보다 몸에 좋은 것을 먹어야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몸이 되거든. 그런데 요즘 음식들은 배만 부르고 맛만 있으면 돼. 입맛만 만족시키면 재료가 어떤 것이라도 상관이 없단 말이야. 이래서는 안돼. 저절로 병이 생긴단 말이지. 음식을 단순히 음식으로 보면 안돼. 생명과 연관이 있는 것이거든. 이렇게 아무거나 먹고 몸 아프다고 하지. 먹을 것이 없던 시대에는 없어서 못먹었다 치지만 지금은 먹을 것이 넘쳐나는데도 제대로 못먹어. 입맛만 찾아서 그래.”

먹을 것이 없던 시절, 고아들의 입가가 허는 병을 번데기를 먹여서 낫게 한 현 교수의 눈에는 당연히 먹거리와 영양분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다. 식생활뿐 아니라 1954년 서울대 교수로 발령받은 이후 한평생 교육자로 살아온 습관대로 교육에 대한 애정에서도 현 교수는 남달랐다.

집안에서도 교육을 강조하여 형제들과 조카들의 삶까지도 바꾸어놓았다. 둘째 여동생이 서울대 영문과 1학년 재학 중 전쟁이 나서 학교를 그만두고 미8군 통역을 맡아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을 때 나이가 많더라도 공부는 꼭 해야 한다며 강력하게 권유하여 늦게라도 학업을 다 마치게 하였다.

“교육은 무조건 받아야 한다”는 현 교수의 권유로 조카들까지 최소한 전문대학은 다 졸업을 하게 하였다. 여동생들은 이런 현 교수를 두고 “가정의 지주”라며 입을 모은다.

교육에 대한 애정은 가정에서뿐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도 줄지 않아 현 교수는 1억원의 돈을 장학금으로 서울대에 쾌척했다. 공부하고 싶은 학생이 돈이 부족해서 못하게 되는 사태가 생겨서는 안된다며, 자신이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학교에서 준 장학금 덕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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