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과 죽음에 의존한 평화를 진정 평화라 할수 있나
국회도 파병연장동의안 처리때 여론에 귀 기울이길

지난달 27일 미국 뉴욕, 시애틀 등 대도시 11개 지역에서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평화시위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이라크를 점령한 미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전쟁 종식을 촉구했다. 더욱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남가주지역 30여개 사회단체들의 집회에서는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지난달 28일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평화행동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라크 파병연장 동의안은 국무회의를 통과했고, 이달 초 국회에 제출될 예정이다. 내용의 골자는 1200명의 한국군을 600명으로 줄이고, 1년 더 이라크에 주둔시키겠다는 것이다.

시민들의 반전평화운동이 국제관계·정치 중심의 정부 정책에 얼마나 연결될지는 미지수다. 그간의 과정을 봐서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는 최근 지난 2004∼2006년 이라크에 파병된 자이툰부대가 사용한 예산이 모두 5000억원 이상인데, 실제 이라크 재건비용은 99억원밖에 사용되지 않은 사실을 정부가 숨겨왔다고 주장하며 예·결산서를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안보의 논리가 작동한다. 언론들은 전문가들을 내세워 노무현 대통령이 파병연장의 근거로 언급한 한·미동맹과 경제실익의 정도를 분석하고, 국익 중심의 현실적 국제정치론을 펼친다. 정치권은 어떠한가. 대선후보들이나 정치인들의 파병연장 시비는 국내 선거용으로 요란스럽기만 하다.

어디에도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는 평화는 없다. 6자회담이나 남북정상회담 등 돌아가는 사태를 보면, 결국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이라크 전쟁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식이다.

누군가의 희생과 죽음에 의존하여 이루어지는 평화, 그것을 우리는 평화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정부가 21세기 한·미동맹은 지역의 균형자로서 파트너십의 평등성에 있다고 아무리 설파해도, 형님 모시듯 미리 고개 숙이고 들어가는 남성적 근성이 국제현실이라는 인식에 의해 포장되는 한 평화의 문을 열 수 있는 현실은 보이지 않는다.   

15년 전 이 무렵, 그리고 계속되는 ‘윤금이’(1992년 10월 경기 동두천에서 주한미군 병사에게 살해됨)들의 죽음은 한·미동맹이 여성의 몸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라크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신디 시핸의 미군철수 주장은 모든 생명은 귀하다는 ‘현실’을 드러낸다. 미군의 폭격으로 아들을 팔루자시에 묻고, 남편 없이 혼자 13명의 아이를 키우는 파우지야의 고단한 삶이나, 전쟁의 후유증으로 죽음에 이른 팔루자의 한 여인도 엄연한 ‘현실’이다.

국회가 이 엄연한 현실을 보지 못하고 국익의 현실적 정치론만을 내세운다면, 그야말로 비현실적이다. 한·미동맹이 아닌 평화동맹을 외치는 글로벌 시민들과 여성들의 탈식민화하려는 목소리가 지금, 현실적 정치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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