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다섯 딸들과의 ‘문턱’ 넘기

5명의 딸들과 식사를 같이 하기로 한 건 오래 전이고 딸들 간에도 만나자는 말이 오가곤 했었다. 그런데 각자 바쁜 스케줄을 가진, 개성 강한 5명의 딸들을 한 날, 한 장소에 모아놓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고 모아놓으면 어떤 분위기가 될 지도 내심 걱정되었다. 계속된 상담이 촉진제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내 큰딸의 생일을 계기로 모두 모였다. 우리 결혼식을 20여 일 앞둔 날이었다.

나는 함께 저녁식사 하는 시간 내내 이 딸, 저 딸 얼굴을 쳐다보며 긴장했었다. 아무 일 없이 그런대로 잘 끝났다 싶었는데,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이와 크게 다투었다. 식사 중 그의 딸이 툭 던진 사소한 말 한 마디가 가시처럼 마음에 걸렸던 내가 끝내 그에게 그 얘기를 했던 것이다. 사실 예전 교제할 때 같으면 그냥 넘어갈 일이었는데 결혼할 입장이 되니 ‘문제다’ 싶은 거를 그에게 확실히 어필해 두고 싶었다. 나는 그가 그런 내 감정을 그냥 수용해 주었으면 했는데 그는 예상 외로 내 태도에 몹시 언짢아했다. 두 시간 이상 차를 세워놓고 얘기했지만 결국 서로 자신의 딸들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한다며 크게 서운해하다 헤어졌다.

“이러면 숨 막혀서 못살겠다.” “나도 그렇다.”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던진 말이었다.

초혼 때는 양가 부모 눈치 때문에 서로 티격태격하는데 재혼 때는 양쪽 자식 때문에 그렇다. 아니 오히려 더하다. 그냥 자식이 아니라 이혼 후 고통을 같이 겪은 식구이기 때문에 더한 것 같다.

집에 돌아와서도 쉽게 진정되지 않아서 재혼에 관한 책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당당하게 재혼합시다’(장혜경 외 지음, 조선일보사), ‘재혼 그리고 함께 서기’(마주해 지음, 국민일보사)는 그간 틈틈이 읽던 책이었다. 그냥 죽 훑어보았을 땐 다 아는 얘기 같았는데 이번 건으로 부닥치니 실감이 났다. ‘재혼가족 문제가 이런 거구나’싶었다.

늦게까지 책들을 보다가 잠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면서 든 첫 생각은 “내가 어제 과민했다”였다. 생각을 좀 더 정리할 겸 상담자에게 전화했다. 상담자는 한 마디로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조언했다.

일요일 교회를 가기 위해 만난 그의 얼굴이 잠을 제대로 못 잔 듯 까칠해보였다. 쑥스럽게 웃으며 화해를 청하니 그도 선뜻 응하면서 이렇게 말을 마무리했다. “사귈 때는 자녀들에 대해 너그럽게 생각하더니 막상 결혼을 앞두고는 편협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압박하는 것 같아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그전에 많은 공감대를 가졌던 날들을 새겨보면서 결혼을 앞두고 서로 예민해져서 그런 거라 보고 앞으로 더 넓은 마음으로 잘해 나가자”라고.

그와 나는 이렇게 싸우면서 또는 부닥치면서 재혼 가족의 갈등을 풀어나갔다. 양쪽 가족의 내용적 통합을 이루기 위한 노력과 함께 재혼의 형식을 어떻게 갖출 지 많이 생각하고 오래 고민했다. 딸애들은 부모의 재혼식이 조용히 치러지길 바랐다.

한편 우리와 절친한 선후배들은 이왕 혼인할 바에는 알릴 만큼 알리고 제대로 식을 하라고 자문했다. 재혼이 무슨 잘못이라도 되는 양 비밀리에 하면 괜한 오해만 살 수 있으니 떳떳하게 하라는 주문이었다. 더구나 정치인이므로 더 그렇다는 것이다. 알음알음 미리 소식을 전해들은 여성계 동지들은 축하한다며 꼭 알리라고 했다.

평소 우리 둘을 잘 알아 지지해 준 김경애 교수가 아예 ‘복합가정 결혼식 행사 기획안’이라며 참신한 아이디어들을 전해주기도 했다.

여러 고민 끝에 결국 혼인식을 공개적으로 하기로 결정은 했지만 그 예식을 준비하기에 시간이 너무 없었다. 늦은 나이의 재혼이라 누구에게 예식 준비를 챙겨달라고 하기도 민망했고 또 한시도 쉴 틈 없이 밀려오는 바쁜 국회의원 일정 때문에 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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