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공부]

그러니까 벌써 10년쯤 된 일이다. 여성신문 박혜란 편집위원이 쓴 책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이 출간된 지가. 세 아들의 육아 경험담을 담은 그 책은 꽤 인기가 많아서 당시 박혜란 위원은 어머니 대상 교육 특강에 불려 다니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우연히 만난 그가 특강을 하면 부모들의 반응이 어떠하냐는 내 질문에, 안타까운 듯 되뇌던 말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이들을 방치하라는 게 아닌데 엄마들은 그런 내 말을 이해해 주지 않네. 아이가 스스로 할 때까지 조용히 지켜봐 주라는 건데, 조용히 지켜봐 주는 일도 훌륭한 교육인데…”

이해 못할 법도 하다. 아이도 의식하지 못하게 가만히 지켜보면서 기다려 주라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기엔 세상이 너무나 위험 투성이이며, 엄마의 현실은 고단하고, 그리고 아이들은 못 말리는 천둥벌거숭이다. 간섭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지켜보는 일은 허벅지를 찔러대는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아이가 다 자라기 전에 엄마들의 가슴은 숯 검댕이 되어 있거나 머리 뚜껑이 열려 버릴 것이다. 도대체 우리보고 도를 닦으란 말인가?

그 뒤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이제야 나는 아이 키우는 일이 결국은 도 닦는 일임을 받아들이게 됐다. 아니, 육아만큼 오랫동안 철저하게 도 닦게 하는 일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 아이들을 인정하고 믿기 위해선 우선 나 자신을 인정해야 하고, 기다려 주는 일이 즐겁기 위해서는 지금의 내 모습에 만족해야 한다. 그게 가능하려면 우선 내 마음속에 잠복한 두려움과 불안과 불만족과 집착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이다.

내 안의 못난 점을 인정하고 스스로 위로하며, 변화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과 육아는 한 치도 어긋나지 않게 맞물려 있었다. 그러니까 육아는, 아이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 내 안의 불행을 성찰하고 그것을 치유해 나가는 복합적이고도 통합적인 수행과정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 과정에서 아이는 내 의식 성장의 스승이자 바로미터가 됐다. 실수 연발에 신경질쟁이인 엄마를 조용히 지켜보고,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사랑해 준 것은 오히려 아이들 쪽이었으니까.

물론 아이를 키우면서 경험하는 정신적인 성숙이 현실적인 장애 때문에 지체될 수 있다. 나 역시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직장일에 매달리면서 늘 시간적이고 경제적인 쪼들림과 씨름해야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그 유난한 무게감 때문에 다시 세상이 원망스러워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어려움이라면 차라리 적당히 어울려 가는 법도 괜찮을 듯싶다. 현실의 장애와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면서 그 재미를 느껴보는 것 말이다. 그것도 여간한 내공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니 도 닦는 일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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