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더하는 말풍선]

*이 글은 작품의 줄거리와 결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실키 작가의 ‘김치 바게트(Kimchi Baguette)’. ⓒ현암사 제공
실키 작가의 ‘김치 바게트(Kimchi Baguette)’. ⓒ현암사 제공

서로 다른 문화권을 비교할 땐 소위 중립적인 시선이 요구될 때가 많다. 하지만 ‘김치 바게트 (Kimchi Baguette)’는 모두가 공감할 보편적인 시선이 아니라, 철저히 한국인 여성의 시점을 고수한다. 작품의 주인공인 ‘실키’가 소개하는 것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쓰인 친절한 관광 안내지 속 한국과 프랑스가 아니라, 한국인 여성이라는 지극히 특수한 위치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한국과 프랑스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한국인 여성이라는 실키의 위치성은 이중으로 주변화된다. 한국인 여성은 한국에서도 소수자고 프랑스에서도 소수자다. 성차별과 인종차별은 따로따로 찾아오지 않는다. 가부장제 사회도 백인 중심 사회도 한국인 여성이 편안하게 소속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이중으로 주변화된 실키의 위치성은 한국의 보수적인 성 관념과 프랑스의 아시안 혐오를 가장 예리하고 기민하게 관찰할 수 있는 위치이기도 하다. 어떤 집단에 완벽하게 속해 있을 때보다, 그 집단으로부터 튕겨 나와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진짜 주제는 거리 그 자체다.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거리에 대한 이야기고, 한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완벽하게 환대받지 못한 경험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실키는 좁히지 못할 거리를 슬퍼하거나 억지로 없애려 하지 않는다.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만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소속된 사회로부터 거리감을 느껴본 적 없는 사람들, 그래서 성차별과 인종차별의 교차로에 서 있는 실키의 경험을 이해할 수 없던 사람들에게 프랑스를 바라볼 새로운 ‘시점’을 소개한다. 

‘김치 바게트’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실키와 그의 프랑스인 파트너 ‘막스’의 일상 대화다. 친밀한 관계 속 대화가 으레 그렇듯,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별다른 이유 없이 흘러가는 과정에서 둘은 서로의 문화를 배운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에 관한 논의 역시 너무나 당연하게 일상 대화의 일부다. 대의를 위해 무거운 마음으로 꺼내는 소재가 아니다. 프랑스에 사는 한국인 여성 당사자에게 차별이란 그러고 싶지 않아도 숨 쉬듯 생각하게 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와 일상을 함께하는 건, 그가 겪은 차별에 대해 알아가겠다는 마음을 수반한다. 

실키 작가의 ‘김치 바게트(Kimchi Baguette)’. ⓒ현암사 제공
실키 작가의 ‘김치 바게트(Kimchi Baguette)’. ⓒ현암사 제공

서양에서 우스꽝스럽게 묘사되는 아시안 재현의 문제를 지적하는 실키에게 막스는 “그럼 아시아인을 어떻게 그리라는 거야?”라고 묻는다. 실키는 대답한다: “그냥. 사람처럼.” 실키의 대답은 냉소도, 비난도 아니다. 애초에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에 논리적인 정반합은 필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실키가 막스의 질문에 대답했다는 사실이다. 대답은 그 자체로 나의 시선을 공유하는 과정이다. 관계를 이어갈 마음이 없다면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질문이지만, 내가 여기에 당신과 함께 있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기 때문에 실키는 대답하고, 설명하고, 소개한다. 

실키 작가의 ‘김치 바게트(Kimchi Baguette)’. ⓒ현암사 제공
실키 작가의 ‘김치 바게트(Kimchi Baguette)’. ⓒ현암사 제공

소개는 관계의 시작이자 과정이다. 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은 곧 끊임없이 자신과 자신의 시점을 소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개도 반복하다 보면 힘들다. 나에겐 당연한 이야기가 남들에겐 특이하고 신기한 이야기가 되는 것은 속상하고 지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키는 펜을 든다. 관계가 소중하니까. 연인과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왜 이런 사람으로 자라났는지 알리고 싶으니까.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길 바라지 않기에 동거, 피임, 브래지어에 관해 이야기한다. 존댓말과 반말, 세는 나이와 만 나이, 설날 떡국과 김장 문화 등 너무 당연해서 별것 없어 보이는 정보들을 이토록 성실하게 말풍선에 꾹꾹 눌러 담는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교차하는 곳에 서 있는 아시안 여성의 시선으로 풀어낼 때 가장 진실하게 숙고할 수 있는 문제들이 있다. 아시안 여성만이 볼 수 있는 세상이 있다. 그렇다면 그 세상에 관해 이야기해야만 한다. ‘김치 바게트’는 아시안 혐오와 여성 혐오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굵직한 선화로 한 획 한 획 담대하게 다가가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프랑스와 한국을 소개하고 또 소개한다. 그의 작품은 누락되어선 안 되는 시점에 대한 이야기이자, 꾸준하고 성실한 애정의 표현이다. 어디 서 있느냐에 따라 달리 보이는 세상이기에, 당신이 잠깐이나마 내가 발디딘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나의 시점을 경험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김치 바게트(Kimchi Baguette)’는 프랑스 웹매거진 ‘마탕! (Matin!)’에 연재된 방데시네(bande dessinée)로, 실키 작가가 7년이 넘는 시간 동안 프랑스에 거주하며 겪은 인종차별, 성차별, 문화 차이를 다룬다. 한국어 번안본은 지난해 12월 현암사에서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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