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린 송 감독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 이 글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1일 열린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다른 작품들에 밀려 각본상도, 작품상도 받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를 만난 기쁨이 줄어들 이유는 없다. “한 번 더 보고 싶었어.” 이 말은 영화 속에서 ‘노라’와 ‘해성’ 두 남녀 주인공이 했던 말이지만, 내가 이 영화에 대해 하고 싶던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두 번 관람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한 그의 첫 영화이다. 송 감독은 한국에서 태어나 12살까지 한국에서 자랐다. 그러니 영화는 그의 개인적 경험이 바탕이 됐고 그만큼 한국인의 정서에 와닿는다. ‘인연’이라는 단어를 모르던 다른 나라 관객들에게도 영화에서 받는 느낌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한국인의 정서와 세계인의 정서가 연결되는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해외에서의 반응은 뜨거웠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최근 본 작품 중 가장 좋았던 영화”라고 말했고, 올해 전미 비평가 협회상(작품상), 런던 비평가 협회상(외국어 영화상), 미국 감독 조합상(신인감독상) 등 각종 시상식에서 상을 휩쓸었다. 아카데미상을 못 탄 것이 무슨 대수이겠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컷 사진= CJ ENM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컷 사진= CJ ENM

스토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첫사랑 ‘나영’(미국 이름 노라, 그레타 리)과 ‘해성’(유태오)이 24년만에 뉴욕에서 다시 만난다. 만났다가 끊어지곤 했던, 두 사람의 특별한 인연을 돌아보는 이틀 간의 운명적인 이야기이다. 12살의 어느 날, '해성'의 인생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첫 사랑 '나영'. 12년 후 ‘노라’가 된 '나영'은 뉴욕에서 작가의 꿈을 안고 살아가다 SNS를 통해 우연히 어린시절 첫 사랑 '해성'이 자신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페이스북 친구가 되어 12년 만에 화상통화로 재회의 기쁨을 누린다.

해성: “좀 말이 안 되지만…… 이런 말 해도 되나?”
노라: “뭐라고 하고 싶은데?”
해성: “보고 싶었어.”
노라: “나도. 말도 안돼.”

그런 기쁨도 오래가지는 못한다. 노라는 어렵게 말을 꺼낸다. “난 우리 잠깐 연락을 끊었으면 좋겠어.” “난 여기서 뭔가를 해내고 싶어. 여기에 있는 인생에 충실하고 싶은데. 내가 맨날 서울 가는 비행기를 찾아보고 앉아 있는 거야.” 그래서 스카이프의 접속을 끊고 노트북을 닫는 노라의 뒷모습은 처연해 보인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컷 사진= CJ ENM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컷 사진= CJ ENM

노라는 ‘잠깐’이라고 했지만 두 사람이 다시 만나기까지 다시 12년의 세월이 흐른다. 또 한 번의 12년 후, 해성은 인연의 끈을 붙잡기 위해 용기를 내서 뉴욕을 찾아가 결국 노라를 만난다. 24년만에 만난 두 사람은 함께 길을 걸으며 서로 “와”, “와”, “와”, “와” 감탄사를 내뱉는다. 다시 만나니 너무 좋다는 감정의 표현이다. 잠시 어린 시절의 첫 사랑으로 돌아가 함께 돌아다니는 노라와 해성. 노라의 남편 아서는 해성이 왔다는 얘기를 듣고는 ”매력적이야?”라고 묻는다. 이럴 때 대개의 남편은 첫 사랑과의 해후를 싫어하고 방해하는 입장이 되지만, 아서는 노라의 마음을 이해하는 무척 좋은 남편이다. 아서라고 그런 상황이 달가울리야 없지만 그래도 노라를 이해하고 배려한다. 하지만 아서는 마음 한 구석이 불안하다.

아서: “그 삶에 만족해? 서울을 떠날 때 상상했던 삶이야?”
노라: “나 열두 살 때 말야?”
아서: “응, 이게 그리던 모습이야? 이스트 빌리지의 작은 아파트에 유대인 작가랑 누워 있는 모습. 네 부모님이 원하던 모습일까?”
노라: “여기가 내 종착지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

노라는 자신이 사랑한다는 걸 잊고 있나 보다고 아서에게 말하지만, 아서는 노라가 잠꼬대를 한국어로만 한다는 얘기를 한다. “내가 이해 못하는 말로 꿈꾸는 거. 마음속에 내가 못 가는 장소가 있는 거잖아.” 아서는 노라의 속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 없는 무엇이 있음이 불안하다. 아서가 해성을 집으로 초대해서 인사를 하고는 셋이서 식당과 바에 함께 앉아있게 된다. 아서로서는 참으로 어색하고 불편한 자리, 카메라는 그런 아서의 모습과 표정을 실감나게 잡아준다. 세 사람의 감정을 담담하게 거리를 두고, 하지만 살아있게 담아내는 카메라의 시선이 훌륭하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컷 사진= CJ ENM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컷 사진= CJ ENM

이 영화는 절제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노라와 해성, 그리고 아서, 모두가 감정선을 넘지 않고 서로의 여건을 이해하며 힘들게 절제한다. 노라와 해성은 24년 전에도, 12년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서로 사랑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도 찾던 24년 만의 만남이었는데도 ‘사랑한다’는 말을 입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서로 마주보는 눈에서는 사랑의 레이저가 나오고 있는데, 말 없이 바라만 볼 뿐 손 한번 잡지 않는다.

서로가 이번 생에서 맺어지는 인연이 될 수 없음을 알기에 참고 또 참는다. “니 남편이 좋은게 이렇게 아플지 몰랐어”라는 솔직한 감정을 해성은 노라에게 말할 뿐이다. 바의 저쪽 자리에 함께 우두커니 앉아있던 아서는 “내가 이런 관계에 처할 줄은 몰랐다”고 해성에게 토로한다. “여기 이렇게 당신과 같이 앉아있는 거 말이예요.” 옛 사랑이 자기가 사랑하는 노라를 만나겠다고 뉴욕까지 찾아온 상황이 아서는 얼마나 불편했을까. 하지만 아서 또한 자신의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한 번도 불쾌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영화 <화양연화>가 떠올랐다. 영화에서 차우(양조위)와 리첸(장만옥) 두 남녀의 사랑은 불륜이다. 하지만 둘은 감정이 깊어질수록 절제한다. 비록 바람을 피우는 자기 배우자들과 마찬가지 모습이 되었지만, 그들과 다름을 보이고 싶어한다. “절대, 절대 선을 넘지 말아야 해요. 우린 그들과 달라요.” (리첸) 영화에서는 그 흔한 러브신 하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 관객들에게 이들의 밀회는 불륜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랑으로 남는다. 왕가위 감독은 영화를 시작하면서 자막을 통해 이들의 사랑이 그럴 것임을 예고했다. “그와의 만남에 수줍어 고개 숙였고, 그의 소심함에 그녀는 떠나가버렸다. 왕가위는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고 했지만, 차우는 이루지 못한 미완성의 사랑을 앙코르와트 사원에 있는 한 구멍에 영원히 봉인했다. 차우와 리첸의 사랑이 아름답게 전해진 것은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봉인되어 가슴 속에 영원히 묻었기 때문이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컷 사진= CJ ENM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컷 사진= CJ ENM

노라와 해성의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노라는 해성을 마지막으로 배웅하기 위해 우버가 도착하기로 한 곳으로 함께 걸어간다. 우버가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무거운 침묵 속에서 서로 바라만 본다. 우버가 도착하자 비로소 포옹하며 작별 인사를 나눈다.

해성: “이것도 전생이라면, 우리의 다음 생에선 벌써 서로에게 다른 인연인 게 아닐까?” 
해성: “그때 우리는 누구일까?”
노라: “모르겠어.”
해성” “나도.”

영화에서 ‘인연’과 ‘전생’은 중요한 키워드이다. 셀린 송은 "인연이라는 단어를 설명함으로써 영화를 본 모든 사람이 그 의미를 알게 됐다"면서 "인연은 한국어이지만, 전 세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나 느낌이다”라고 설명했다. “우리 모두는 언제, 어딘가, 누군가와 함께 두고온 삶- ‘전생’이 있다. 다중우주를 넘나드는 판타지 영화의 영웅들은 아니지만, 평범한 인생도 여러 시공간을 지나고 있기 때문에 신기한 순간들과 특별한 인연들이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화의 제목 <패스트 라이브즈>의 의미이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컷 사진= CJ ENM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컷 사진= CJ ENM

영화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일 없이, 요동치지 않고 잔잔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관객들에게 대단히 복잡한 감정을 안겨준다. 20대 시절에 화상으로 재회할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맑고 싱그럽고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다시 12년이 지난 현실 속에서 만났을 때의 감정은 복잡하고 먹먹해진다. 사랑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보는 느낌은 아련하다. 영화는 마지막에 가서 관객들의 감정선을 건드리고야 만다. 해성을 배웅하고 들어오는데 집 앞 계단에 아서가 담배를 피우며 앉아 노라를 초초하게 기다리고 있다. 아서는 노라가 오자 일어나서 껴안고 노라는 아서의 품에 안겨서 목놓아 운다. 아, 저렇게 슬펐구나. 참고 참았던 노라의 속마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 관객들도 울컥하게 된다.

셀린 송 감독은 감정을 억지로 만들어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물 흘러가듯이 영화를 이끈다. <넘버3>와 <세기말>을 만든 송능한 감독의 딸다운 실력을 데뷔작에서 보여주었다. 그레타 리와 유태오의 풋풋한 향기가 나는 연기도 훌륭하다. 대사를 말하기 이전에 표정으로 말 이상의 말을 하곤 한다. 음악도 마지막 순간까지 좋다. 중간에 OST로 나오는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무척 잘 어울린다. 이런 영화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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