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간 이어진 페미니즘 사상검증… 회사도 ‘공범’
여성 비하 반박했더니 '분위기 망친다'며 해고 통보
기업·정부, 법에 따라 여성 노동자 생존권 보장해야

전국여성노동조합, 청년유니온, 정의당 등이 모인 ‘페미니즘사상검증공동대응위원회(공대위)’는 6일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페미니즘 사상검증 피해사례 발표 및 공대위 출범 기자간담회’를 열고 게임·웹툰 등 콘텐츠업계에서 여성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한 페미니즘 사상검증 주요 사례와 향후 대응 계획을 밝혔다. ⓒ박상혁 기자
전국여성노동조합, 청년유니온, 정의당 등이 모인 ‘페미니즘사상검증공동대응위원회(공대위)’는 6일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페미니즘 사상검증 피해사례 발표 및 공대위 출범 기자간담회’를 열고 게임·웹툰 등 콘텐츠업계에서 여성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한 페미니즘 사상검증 주요 사례와 향후 대응 계획을 밝혔다. ⓒ박상혁 기자

“면접일 바로 전날, 제가 지원한 게임회사는 서비스 중인 게임 일러스트의 집게손가락을 수정하고 오프라인 행사에서 ‘페미같다’는 의혹을 산 여성 패널을 배제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면접 당일엔 ‘이번 뿌리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사회에서 민감한 이슈에 이리도 안일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한국 게임업계의 현실임이 피부로 와 닿았습니다.” (게임업계 종사자 A씨)

“회사 대표가 ‘내가 대학생일 때는 좋아하는 여학생을 밤에 따라다니는 것이 당연했다’고 말하며 직원들에게 맞장구쳐주길 바랄 때 저는 ‘그 학생은 좀 놀랐을 수 있겠어요’라고 답했어요. 그러자 ‘사상과 가치관이 맞지 않으니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며 해고 통보를 하더라고요.” (콘텐츠업계 종사자 B씨)

게임업계를 비롯한 콘텐츠 업계에서 여성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한 ‘페미니즘 사상검증’이 계속되고 있다. 악성 이용자들의 사이버불링에 종사자를 보호해야 할 회사가 동조하고, 정부마저 이같은 상황을 방임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국여성노동조합, 청년유니온, 정의당 등이 모인 ‘페미니즘사상검증공동대응위원회(공대위)’는 6일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페미니즘 사상검증 피해사례 발표 및 공대위 출범 기자간담회’를 열고 게임·웹툰 등 콘텐츠업계에서 여성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한 페미니즘 사상검증 피해 사례와 향후 대응 계획을 밝혔다.

넥슨 게임 '클로저스' 성우 김자연씨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이 온라인상 논란이 되면서 김 씨는 일방적으로 해고당했다. ⓒ김자연 씨 트위터 캡쳐
넥슨 게임 '클로저스' 성우 김자연씨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이 온라인상 논란이 되면서 김 씨는 일방적으로 해고당했다. ⓒ김자연 씨 트위터 캡쳐

8년간 이어진 페미니즘 사상검증… 회사도 ‘공범’

공대위는 2016년 넥슨코리아 게임 ‘클로저스’의 캐릭터를 맡은 성우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을 표했다가 계약 해지 및 녹음본 교체를 당했던 ‘클로저스 사건’을 포함해 현재까지 알려진 콘텐츠업계 페미니즘 사상검증 주요 피해사례가 8년간 28건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가수, 번역가, 성우, 게임 캐스터, 일러스트레이터, 시나리오 작가, 웹툰 작가, 웹소설 작가 등 콘텐츠 업계에 속한 수많은 업종의 종사자들이 페미니즘 사상검증으로 인해 작업물을 무단으로 교체당하거나 계약해지를 당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페미니즘 사상검증이 시작된 2010년대에는 주로 성우, 캐스터, 일러스트레이터 등 고용안정성이 취약한 프리랜서들을 대상으로 사상검증 및 2차가해가 이뤄졌다. 2020년대에도 사상검증이 계속되면서 4대보험을 적용받는 정규직 직원들까지 부서변경이나 해고 등의 피해를 입었다.

“SNS를 토대로 무차별적인 사이버불링을 가하는 일부 이용자들에 직원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회사마저 동조하고 있다”고 공대위는 지적한다. 회사는 페미니즘 사상검증 논란이 시작되면 사실확인보다 먼저 작업물을 교체하고, ‘페미니즘은 반사회적 사상’이라며 이용자들을 두둔했다. 논란이 발생한 회사의 개발자가 온라인 커뮤니티에 머리를 박고 절을 하는 사진과 함께 사과문을 올리기도 했다.

손가락 모양으로 ‘남혐 캐릭터’ 논란이 불거진 메이플스토리 엔젤릭 버스터 리마스터 영상 일부.
손가락 모양으로 ‘남혐 캐릭터’ 논란이 불거진 메이플스토리 엔젤릭 버스터 리마스터 영상 일부.

여성 비하 반박했더니 '회사 분위기 망친다'며 해고 통보

콘텐츠업계에서 종사하는 여성 창작자들은 외부에 알려진 사례는 일부에 불과하며, 사상검증이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다고 호소했다.

공대위는 지난해 8~12월 총 총 56명의 콘텐츠업계 종사자에 77건의 사상검증 피해사례를 제보 받고 이를 7개 유형으로 분류했다.

구체적으로 페미니즘 사상검증은 △사이버불링 △작업물 교체 및 고지 없는 무단수정 △직장 내 괴롭힘 △부당해고 및 계약해지 △채용성차별 및 입사 취고 △SNS 검열 및 관리 △계약서상 불이익 조항 등 채용부터 해고에 이르는 과정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졌다.

회사는 ‘논란을 줄이기 위해’ 채용과정부터 여성 창작자의 사상을 묻는다. 회사에 지원한 창작자의 SNS를 뒤져 페미니즘 관련 게시물이 있는지 확인하고, 면접장에서는 숏컷이나 화장을 하지 않은 차림으로 갔다는 이유로 페미니스트라고 의심한다. 

면접관이 여성 지원자에게 “당신은 페미인가? 메갈인가?”라고 질문하고, “그런거 안 한다”고 답하자 “올바른 여성이다. 앞으로도 그 가치관을 유지하길 바란다”고 말한 경우도 있었다. “군대에 대한 생각”, “결혼 할 생각이 있느냐” 등 업무와 무관한 질문으로 압박면접을 당했다는 사례도 있었다.

합격 후에도 사상검증은 계속된다. 창작자들은 계약서의 “재직 중 SNS에 물의를 일으킬 경우 본인이 피해를 보상한다”는 불이익 조항에 서약해야만 입사할 수 있다거나, 회사 내에서 “우리 회사에 페미 없겠지?”라고 묻거나 “페미는 정신병이고 패버려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오가는 등의 조롱에도 침묵해야 했다.

침묵하지 않는 순간 해고의 위협에 놓인다. 한 여성 창작자는 20대 남성 직원이 “요새 사회문제는 다 메갈이 일으킨다”며 여성을 욕하는 말에 반박하자 이사에게 “회사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며 해고 통보를 당했다. 다른 콘텐츠업계 종사자는 “내가 대학생일 때는 좋아하는 여학생을 밤에 따라다니는 것이 당연했다”는 말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하기도 했다.

피해사례를 분석한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 “여성 창작자들은 말 한 마디 자유롭게 할 수 없도록 통제하는 직장 내 분위기에 매순간 살얼음판을 내딛는 기분으로 직장생활을 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며 “회사를 운영하는 이들 자체가 폭력적인 여성혐오주의자들과 동일한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인지도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전국여성노동조합, 청년유니온, 정의당 등이 모인 ‘페미니즘사상검증공동대응위원회(공대위)’는 6일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페미니즘 사상검증 피해사례 발표 및 공대위 출범 기자간담회’를 열고 게임·웹툰 등 콘텐츠업계에서 여성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한 페미니즘 사상검증 주요 사례와 향후 대응 계획을 밝혔다. ⓒ박상혁 기자
전국여성노동조합, 청년유니온, 정의당 등이 모인 ‘페미니즘사상검증공동대응위원회(공대위)’는 6일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페미니즘 사상검증 피해사례 발표 및 공대위 출범 기자간담회’를 열고 게임·웹툰 등 콘텐츠업계에서 여성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한 페미니즘 사상검증 주요 사례와 향후 대응 계획을 밝혔다. ⓒ박상혁 기자

기업·정부, 법에 따라 여성 노동자 생존권 보장해야

공대위는 “회사와 정부는 표현의 자유 및 사상의 자유라는 기본적인 헌법적 가치를 침해하는 행위로부터 여성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며 피해자 보호지원 및 회사와 정부를 압박하는 활동을  이어나가겠다고 밝혔다.

강미솔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근로기준법, 남녀고용평등법, 산업안전보건법 등에서 여성혐오 및 차별적 관행을 금지하는 규정과 제도를 일부 두고 있으나, 기업들은 여성 노동자에게 불이익 대우를 일삼고 고용노동부의 근로감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보라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도 “회사는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노력할 책임이 있고, 국가는 모든 시민이 안전한 노동 조건 속에서 일할 수 있도록 책임을 다해야 한다”며 “공대위는 법과 제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회사와 정부를 압박하고 기존법에서 다뤄지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도록 공백을 채워나가는 활동을 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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