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해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정치를 꿈꾸며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내 정의의 여신상. 한 손에는 법전을, 또 다른 한 손에 공정성을 의미하는 저울을 들고 있다. ⓒ여성신문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내 정의의 여신상. 한 손에는 법전을, 또 다른 한 손에 공정성을 의미하는 저울을 들고 있다. ⓒ여성신문  

성폭력 피해자가 법적 고소 과정에서 금전적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공식적인 방법은 형사 단계에서의 합의·공탁과 가해자 손해배상제도로서 배상명령과 형사조정, 그 외 민사상 손해배상청구가 있다. 이는 각각의 장단점이 존재하지만, 유죄가 입증된 가해자가 감형 사유인 ‘진지한 반성’과 ‘상당한 피해회복’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직접적인 방법은 합의·공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피해자들은 합의를 원치 않기 때문에 가해자들은 법원에 공탁금을 걸어 반성이나 피해회복을 위한 노력임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2022년 12월 피해자의 개인정보 없이도 공탁이 가능하도록 한 형사공탁특례제도가 시행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점차 성범죄 전담 로펌의 ‘뉴라이징 전략’으로서 재판 후 선고 직전, 피해자가 대처하거나 인지하기 어려운 짧은 시간에 공탁금을 걸어 감형을 받는 이른바 ‘기습공탁’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최근 성범죄 519건 중에 288건이 선고 2주 이내 공탁이 이루어졌고, 이 중 207건에서 공탁이 감경사유로 적용됐다는 기사나, 수집된 66건의 판례 중 28.8%가 기습공탁된 사건이라는 한국성폭력상담소의 발표는 사안의 심각성을 알게 한다. 이는 몇 가지 측면에서 좀 더 촘촘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성폭력의 법적 판단은 누구의 감정에 공감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발표에 따르면 수집된 사례에서 피해자의 75% 이상이 공탁 수령을 원치 않았거나 공탁보다 피고인의 엄벌을 원하고 있었다. 더불어 공탁은 피해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진행되기 때문에 ‘상당한 피해회복’을 확인하기 어려움에도 감형사유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은 고소와 재판의 전 과정에 이르는 피해자의 경험, 선택, 판단, 의지를 불안하게 하고 무력화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책임의 주체 중 하나는 재판부다.

법철학자 마사 누수바움은 법적 판단에 있어 사태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능력과 함께 사건에 연루된 당사자들에 대한 깊은 공감 능력을 가진 ‘분별 있는 관찰자’를 제안한다. 증거에 귀속되어 있고 적합한 방식에 따라 제도적으로 제한되며, 특정한 상황의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감의 감정은 공적 판단에 수용돼야 하며 분별 있는 관찰자는 자신만의 관찰자적 관점에서 그들이 고통이 갖는 의미와 그것이 그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분별 있는 관찰자로서 재판관은 공감에 능해야 하고 기술적 능력뿐 아니라 휴머니티를 위한 능력도 배워야 한다고 강조된다. 이는 피해자에 대한 공감의 감정은 법적 판단에서 비합리적인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더 학습되고 훈련돼야 할 영역이며, 피해회복과 가해자 반성에 대한 판단의 핵심에는 피해자 경험의 맥락적 의미를 사유할 수 있는 감수성과 왜곡된 채로 비어 있는 법적 여백을 채울 수 있는 공감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둘째, 성폭력 사건에서 합의·공탁 등의 금전적 보상이 피해자에게 용서의 메시지를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이다. 최근 ‘합의해주지 않으면 공탁 걸어서 감형 받을 수 있으니 합의에 응하라’는 가해자들의 압박이나, 때때로 주변인들의 권유와 강제의 경계에서 마지못해 합의나 공탁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은 피해자에게 마치 ‘이제 그만 가해자를 용서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나는 더 많은 피해자들이 적극적으로 고소하고, 충분한 금전적 보상도 받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내 피해의 금액은 얼마인지, 이 돈을 받으면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인지 등 내 피해를 돈으로 환산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심리적 불편함을 동반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때때로 공탁금의 액수는 감형에 영향을 주고 있다. 피해자의 의사나 회복에 대한 기여와 관계없이 더 많은 금액을 공탁한 가해자가 더 많은 감형을 받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피해의 후유증과 깊이는 피해를 둘러싼 전 과정들 속에서 만들어지고 지속되고 종종 새로운 형태로 등장한다. 금전적 보상은 피해회복의 긴 여정에 작은 일부에 불과하며 이는 가해자에 대한 용서와 무관한 일이다. 따라서 피해회복의 내용과 선택의 주체는 피해자여야 하고, 회복에 필요한 구체적 내용들은 막연하고 무책임한 방식의 금전적 보상을 넘어 더 넓은 공론장에서 촘촘하게 논의돼야 한다. 감정의 정치학을 연구한 사라 아메드는 고통의 정치성을 논하면서 고통은 우리에게 다르게 살아내기 위한 행동과 집단적 정치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이는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초한 정치가 아니라 화해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정치, 다른 이들과 함께 살면서도 우리가 하나가 아님을 배우는 정치를 요하는 것이다. 이제 성폭력 가해자의 처벌과 금전적 보상을 둘러싼 문제에서 채워져야 할 것은 화해할 수 없는 것과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기 위한 집단적 정치여야하고 다르게 살아내기 위한 우리들의 스토리텔링이다.

형사공탁특례제도 시행 이후 다방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강해지고 법원행정처는 업무처리 방식을 변경하겠다고도 하고, 공탁법 개정에 대한 논의들이나 피해자의 동의 없는 공탁을 인정하지 않은 판례들도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법적 지원이 산업화되고 시장화 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전략은 끊임없이 개발될 것이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들의 뿌리, 즉 성폭력의 법적 판단 과정에서 법 감정은 누구에게 공감하고 있는가에 시선을 놓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다.  

*참고자료
1) 2023.11.20.일자, 「KBS 뉴스」, “판결 988건 최초 분석…절반 이상 ‘기습공탁’ [형사공탁 1년]”,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821970  
2)  한국성폭력상담소(2023), 「형사공탁 특례제도 시행 1년 : 성폭력 피해자 지원 현장의 목소리」, 한국성폭력상담소.  
3)  마사 누수바움 저, 박용준 역(2013), 『시적 정의 –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 궁리. 
4) 사라 아메드 지음, 시우 옮김(2023), 『감정의 문화정치』, 오월의 봄.

 

김보화 젠더폭력연구소 소장‧여성학 박사 ⓒ여성신문
김보화 젠더폭력연구소 소장‧여성학 박사 ⓒ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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