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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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경험한 폭력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가해자가 가족이라면 더 숨겨야 한다고 여겼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 괜찮을 거라고, 이곳을 벗어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집 밖도 안전하지 않았다. 대학 선배는 이유도 없이 술집 뒤에서 폭력을 행사했다. 존경했던 교수님은 자신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소리를 지르며 손을 들어올렸다. 가부장의 언어는 평소에 좋은 선배, 선생님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그들의 심기를 건드릴 때 갑자기 찾아와 내 몸을 얼어붙게 했다.

더 최악은, 그토록 싫었던 할아버지・아버지의 술주정, 소리를 지르며 상대방을 위협하거나 포로를 심문하는 심문관을 나도 비슷하게 흉내 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술에 취하시면 꼭 할머니나 어머니, 자식들에게 언어폭력을 행사했다. 그 기저엔 폭력을 통해 가부장으로서 긴장과 불안을 해소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들과 같은 길을 걷는 건 아닐까. 불안과 염려가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를 페미니즘 언어로 풀어내자, 과거의 상처는 나와 가족만의 문제가 아닌, 남성 가부장이 행사하는 권력의 문제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조앤 윌리엄스 캘리포니아 주립대 법대 명예교수가 한국의 출생률을 보고 "대한민국 완전히 망했네요. 와! 그 정도로 낮은 수치의 출산율을 들어본 적도 없어요."라고 말했다. ⓒ EBS 다큐멘터리 캡처
조앤 윌리엄스 캘리포니아 주립대 법대 명예교수가 한국의 출생률을 보고 "대한민국 완전히 망했네요. 와! 그 정도로 낮은 수치의 출산율을 들어본 적도 없어요."라고 말했다. ⓒ EBS 다큐멘터리 캡처

한 친구가 ‘합계출산율 0.72명’, ‘대한민국 곧 소멸'이란 제목의 기사를 공유하며 "대한민국 망했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어서 안정적이지 못한 우리의 경제적 사정을 토로하며, 결혼은 물론 연애도 포기하는 세상에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걸 생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이성애 중심의 연애・결혼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의 말에 그것만이 정답은 아니라고, 프랑스의 팍스(PACS, 이성 또는 동성 성인 간 결합 제도)를 얘기했다. 하지만 친구는 그건 프랑스니까 가능하다고, 한국에서는 어렵다며 부정적인 답변을 보였다.

나도 몇 년 전까지 남성과 여성이 만나 아이를 낳는 이성애 가족 중심의 재생산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박근혜 정부 당시 저출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으로 ‘대한민국 출산지도'라는 누리집이 공개됐을 때, 많은 여성이 분노하며 자신들은 아이 낳는 가축이 아니라는 외침을 이해하지 못했다.

2023년 11월 25일 여성의당은 시위를 열고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이 규정하고 있는 ‘여성폭력’의 정의에 ‘여성증오범죄’를 포함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사진=여성의당 제공)
2023년 11월 25일 여성의당은 시위를 열고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이 규정하고 있는 ‘여성폭력’의 정의에 ‘여성증오범죄’를 포함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사진=여성의당 제공)

나는 왜 여성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을까? 우리의 삶이 무엇이 그렇게 달랐을까? 고민하던 중 크리스티안 자이델이 쓴 『지구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독일인 남성 PD가 1년 동안 여장을 하며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로, 남자와 여자에게 강요되는 여러 가지 고정관념과 여성과 소수자, 약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고발한 내용의 책이다.

흥미로웠다. 모두가 선망하는 성공을 거둔 남성 방송인도 자신의 불안(이상적인 남성성을 유지하지 못함에 대한 불안)을 숨기기 위해 얼마나 온 힘을 다했다, 추운 겨울 불편한 내복 대신 스타킹을 신기 시작하면서 고정된 남성성을 벗어날 때 일상을 위협하는 혐오와 폭력이 어떻게 찾아오는지 밝혔다. 그럼에도 그를 응원하고 환대하는 다양한 존재들 덕분에 변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책을 덮으며 나의 악몽들이 떠올랐다. 아버지와 주먹질을 하며 치열하게 싸우거나,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는 꿈들. 어쩌면 이런 꿈이 내게 보여주는 건 고정된 성 역할과 이를 수행하면서 겪은 긴장과 불안을 보여줬던 게 아닐까.

 ⓒ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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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성/들』의 저자 코넬의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빌려 말한다면, 여성에 대한 폭력은 이상적인 남성성을 획득하지 못한 남성이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지배함으로써 남성 우위를 확인하기 위한 수단이다. 결국 페미니즘을 통해 나는 내가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건 폭력을 용인하게 하는 가부장제도며, 연대를 통해 치유와 회복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나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이 가지고 있는 특권을 누려왔다. 그래서 남성의 입으로 페미니즘을 꺼내는 게 부담이 될 때도, 환영받지 못하는 순간도 있음을 알고있다. 그러나 ‘용기'를 내서 페미니즘의 언어를 계속 말하고 싶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날카로운 도구인 동시에, 우리가 진정으로 맺어야 할 관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보여주니까. 사람 간의 차이를 존중하고, 여러 관계의 가능성을 확대할 때 비로소 새로운 가능성을 맞이할 수 있으니까.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를 벗고 페미니즘 언어가 회복과 치유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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