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7일 강원 춘천시 내 한 고등학교에서 3학년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3년 8월 7일 강원 춘천시 내 한 고등학교에서 3학년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연합뉴스

남성이 왜 페미니즘을 알아야 하느냐는 질문은 남함페 활동가들에겐 단골 질문이다. 이전에는 통계와 고전을 인용하며 고지식한 말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이제는 간단하고 편안하게 이야기한다.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잃어버렸던 걸 다시 찾으실 거예요.”라고.

남성들은 자라며 반드시 누군가에게 자신의 내면을 부정당한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신의 마음 한구석 스위치를 꺼버린다. 가부장제는 그것을 두고 진짜 남자가 된 것이라 한다. 무언가를 잃었는데, 무언가가 되었다고 말하는 꼴이다. 반면 페미니즘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발음한다.

당신이 잃어버린 건 자기 자신이며, 그건 다시 되찾아야 하는 것이라고. 나의 10대가 잃어버렸던 것은 감정선이었고, 다시 일어선 것은 본연의 나였다. 나다움의 회복, 이것이 남성이 페미니즘을 해야 하는 이유다.

ArthurHidden ⓒ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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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렸을 때부터 말 없는 것들을 좋아했다. 선인장 화분이나 둥근 조약돌, 녹슨 철봉에 시선이 갔다. 말 있는 것들도 좋아했다. 하지만 두려웠다. 친구를 사귀기 어려운 성격은 아니었으나 진심으로 가깝다고 느끼는 친구가 없었다.

그럼에도 외롭고 싶지는 않았기에, 목소리 좀 낸다는 무리에 속하고자 노력했다. 이를 테면 말을 거칠게 하고, 누군가를 특징 잡아 희화화하며, 일상의 폭력에 무심한 척 했던 것이다. 겉으로는 친구들이 많아졌지만 속으로는 불편했다.

나는 이들이 왜 밑도 끝도 없이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는 친구를 멸시하는지, 슬리퍼로 잠자리를 때려죽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여기서 허튼 소리를 했다가는 어떤 결과가 뒤따를지 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까지 피해갈 수는 없었다. 나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일상의 폭력을 묵인한 결과는 결국 나에게로 돌아왔다.

 Anastasiia KucherenkoⓒShutterstock
 Anastasiia KucherenkoⓒShutterstock

어느 날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감명 깊게 읽었다고 발표했던 나는 무리로부터 오글거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역사 과목 부장으로서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다큐멘터리를 집중해서 보자고 외쳤을 때는 ‘진지충’ 소리를 들었다.

진지충이 별명이 될 때까지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자, 나는 나 자신을 자책하고 부정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기 위해, 감정으로 향하는 내면 회로를 꺼버리려고 노력했다. 누군가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데 동참하고 방관했던 삶은 결국 나 자신도 가장자리 끝에 서있도록 만든 것이다.

10대를 건너며 축적한 경험이 학교폭력의 이름으로 다뤄지지 않았다고 해서 사소한 것이 될 수는 없었다. 이제와 돌이켜보건대 당시 내가 솔직하게 느꼈던 감정을 억누른 기압은 남성성이었고, 그 성분은 무감함이었다. 나는 이러한 새로운 해석의 언어를 대학에서, 여성들에게 배웠다.

“진지충이 아니라 진중한 거고, 지나가는 잠자리를 죽이면 안 되지. 그리고 감수성이 있는 건 중요해”라는 명료한 응답은 나로선 놀라운 것이었다. 대학 선배와 학창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다 앞선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땐 다 그랬다고, 남자들은 특히 더 그럴 거라고 말하지 않는 그가 새로웠다.

나는 한창 이슈였던 페미니즘 이야기도 꺼냈다. ‘요즘 페미니스트는 다 좋은데, 너무 화를 내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내 학창시절을 변호해준 그가 이번에도 명료한 언어로 동감해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는 내 말을 듣고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고, 며칠 뒤 책을 몇 권 내밀었다.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비롯한 페미니즘 입문서들이었다. 페미니즘이 들어간 제목들이 미심쩍었지만, 평소 적정한 거리에서 나를 잘 대해주었던 선배였기에 책을 펼쳤다.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 ⓒ이한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 활동가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 ⓒ이한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 활동가

그로부터 시작된 페미니즘 활동이다. 화를 내는 여성을 수용하기 어려웠던 건, 사회적으로 여성의 화와 분노는 쉽게 허용되지 않는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의 목소리를 지우는 성차별에 대한 무지 역시 있었다.

여성에게 침묵을 강요한 역사는, 나의 학창시절 감정을 지우려 애썼던 배경과 맥락을 같이한다. 감성적이거나 온정적인 남성은 남성 무리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곧바로 혐오표현의 대상이 되기 쉽다. 남성적이지 않은 것, 동시에 정상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된 남성은 스스로의 내면을 차단하거나, 상처를 근거로 다시 다른 누군가를 상처 입히며 억압을 확산시킨다. 이러한 해석은 페미니즘을 경유한 언어로써 가능하다. 또한 모든 남성은 변화가 필요한 시점임을 절감하고, 행동해야 한다.

벨 훅스는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에서 페미니스트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남성 역시 페미니스트로 태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의제로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다.

남성이 페미니즘을 통과한 목소리로 자신을 말할 때, 우리는 서로를 장애물로 여기는 대신, 같은 곳을 바라보며 청사진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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