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한 영화 읽기]

영화 ‘추락의 해부’ 스틸.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영화 ‘추락의 해부’ 스틸.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진실을 찾는 체하며 실은 진실을 찾는 사람들의 태도를 낱낱이 해부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법정 가족 드라마 ‘추락의 해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남편 사뮈엘이 자신의 가사노동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잘나가는 작가이자 실질적 가장인 부인 산드라 대신 가사와 육아에 더 깊이 관여한 사뮈엘은 몰래 녹취한 부부싸움에서도, 아들 다니엘의 마지막 증언 속에서도 일관되게 자신의 희생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안내견마냥 남들을 먼저 챙기고 배려하는 삶이 고되었다고, 늘 파트너를 위해 일상 리듬, 시간, 언어까지 맞춰주며 살았다고 절규한다. 그런데 사뮈엘이 서사화한 고통을 접한 관객은 기이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평생 독박 육아, 독박 가사에 시달린 부인들이 가져야 마땅할 분노 아닌가.

사뮈엘의 잘 계산된 분노는 같은 노역을 한 부인들 중 상당수가 여전히 당당하게 발화하지 못하는 와중 취해진 전략이기에 더욱 씁쓸하다. 초등교육을 받는 아이가 있는 가정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본 지 너무 오래됐으니 무려 1년의 안식년을 달라고 주장하는 여성 주부의 사례는 분명 흔치 않다. 여자들이 평생 군말 없이 자신을 희생해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를 홀로 키웠으므로 사뮈엘 역시 군말 없이 순종하라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사뮈엘이 사실상 가정의 경제적 위기를 타개하는 데에 기여를 거의 하지 못하는 바람에 이 역할을 도맡았던 산드라를 두고도 ’남편이 힘들게 일을 하는데’ 팬과 놀아났다며 무분별하게 비난하는 검사와 증인들의 성차별적 표현을 듣다 보면, 그들이 공교롭게도 전원 남성이었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사뮈엘의 언어와 여성들의 언어가 너무 다른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만은 명백하다.

‘남성’ 주부로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는 걸 잘 아는 사뮈엘은 고분고분한 가정의 천사 따위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자기 삶을 재구성해 저항적 서사의 질료 삼아 투사로 거듭난다. 그리고 그는 그 과정에서 의도했든 아니든 경력단절의 부당함과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수 세기 투쟁한 여성들의 지적 노고를 너무나 쉽게 전유한다. 사회적 약자의 인권 투쟁의 언어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전파되기 마련이다. 피해자 정체화에 유용한 담론은 누구나 탐내기 때문이다. 정확한 타겟을 위해 고안되었던 언어가 대중적으로 남용되고 결국 최초의 본질과 다른 방향성을 띠게 되는 탈취의 과정을 우리는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가.

영화 ‘추락의 해부’ 스틸.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영화 ‘추락의 해부’ 스틸.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산드라 역시 전형적인 ‘남편’의 말하기를 구사한다는 점이다. 부부 싸움 때 산드라는 “왜 이렇게 흥분했냐”고, “사소한 데 집착하지 말자”고 사뮈엘을 달래는 것 같지만 실은 그를 책망하는 말을 건넴으로써 사뮈엘의 화를 점점 더 돋운다. 산드라가 자기 시간만 중한 줄 안다던 사뮈엘의 비난은 분명 일리가 있다. 첫 장면부터 그는 질문이 많다며 불안해하는 학생에게 “괜찮아, 시간은 아주 넘치도록 많아”라고 답하지 않는가.

산드라는 시종일관 여유 있는 승자의 자세를 취하고 때론 이기적 가부장 특유의 나르시시즘을 보인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매력 자본을 최대한 활용해 상대를 무장해제시키고 대화를 자기 리듬대로 끌어가며 관객에게 미묘한 불편함을 선사한다. 그는 복종이나 저항보다 우아한 군림이 어울리는, 영리하고 냉정하고 자기애로 충만한 여성이다.

남편의 추락을 두고 검사는 살인을, 변호사는 자살을 주장하는 꼭두각시극에서도 산드라는 ‘큰 상황의 아주 일부’만 보고 축적된 역사의 전부를 짐작하지 말라는 논리정연한 호소로 몇 번이고 감탄을 자아낸다. 죽은 남편을 불안정한 환자로 몰아가는 쉬운 길을 피해 오히려 ‘지저분한 이야기는 빼자’며 파트너의 품위도 지켜주려 하는 선택에는 배려와 도덕성뿐만 아니라 온전한 진실에 대한 본능적 지향이, 또 그 모든 걸 가능케 하는 고도의 지성이 전제되어 있다. 산드라의 비범한 작가로서의 재능은 남편 자신도 몰랐던 무의식 너머의 욕망과 좌절, 왜곡된 인식들을 정확히 간파하고 만다.

영화 ‘추락의 해부’ 스틸.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영화 ‘추락의 해부’ 스틸.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게다가 양성애자로서 언제든 남성 없는 삶을 꾸릴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산드라는 남편과 그의 정신과 상담의, 검사와 수사팀장을 위시한 남성들에게 미스터리한 위협이 된다. 산드라가 ‘웃지 않는’, 즉 전형적으로 독일적인 여성이라는 점부터가 그의 - 프랑스 법정에서의 - 이질적 존재감을 한 번 더 강조한다. 그는 여러모로 남성-내국인-지식인들과 다르며 오로지 자신의 지성만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드문 이방인 여성이다. “여성이 지능과 야망, 정신적 강인함 때문에 어떻게 공격당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는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의도는 재판이 모두 끝난 후 산드라가 얻은 것이 오로지 고독뿐이라는 결말의 암시를 통해 슬프게 빛을 발한다.

회사원. 영화 읽고 책 보고 글 쓰는 비건 페미니스트. 브런치: https://brunch.co.kr/@yoo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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