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연극 도전 소녀시대 수영 등 배우들 열연 인상적
2월8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U+스테이지

연극 ‘와이프’. ⓒ글림컴퍼니 제공
연극 ‘와이프’. ⓒ글림컴퍼니 제공

“아내이자 어머니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살겠다”며 문을 쾅 닫고 떠나는 여자. 헨리크 입센의 연극 ‘인형의 집’(1879) 주인공 노라 헬머는 집을 나간 여성들 중 가장 유명한 여성이다.

2024년, 노라의 메시지는 어떻게 확장될 수 있을까? 여전히 고립되고 소외된 이들에게 가 닿을 수 있을까? 연극 ‘와이프’의 답변은 신랄하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혁명가도 나이 들면 ‘꼰대’가 되기 십상이다. 그래도 쉽게 냉소와 좌절을 택하진 말자고, 당당하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포기하지 말자고 이야기한다.

연극 ‘와이프’. ⓒ글림컴퍼니 제공
연극 ‘와이프’. ⓒ글림컴퍼니 제공

‘와이프’는 여성과 성소수자들의 삶, 이들을 향한 사회적 시선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그린다. ‘인형의 집’의 마지막 장면에서 출발해 1959년, 1988년, 2023년, 2046년까지 네 개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배우 6명이 일인 다역을 소화하면서 각 시대를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영국 극작가 사무엘 아담슨의 2019년 작품이 원작이다.

극의 모티브인 ‘인형의 집’은 퀴어 서사가 아니다. 그래도 시대의 도덕적·사회적 경계를 넘어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선 노라의 이야기는 ‘퀴어롭다’. 시대를 초월해 소수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이다. 극중에서도 노라의 이야기는 극중극이 돼 다양한 세대의 관객들과 만난다. 여성이 남성을 연기하는 ‘젠더프리’ 극으로 재해석되기도 한다.

‘와이프’는 노라의 이야기를 접한 다양한 퀴어들의 입을 통해 ‘어떻게 해야 나 자신으로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를 묻는다. 조금은 피곤하고 쓸쓸하고 막막한 이야기다. 한 여배우와 불같은 사랑에 빠졌으나 남편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여성, 남들과 다른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며 동성 연인을 향해서까지 날을 세우는 ‘클로짓 게이’의 묘사는 소수자가 겪는 불안과 절망에 대한 통렬한 반추다.

현실적인 폭력의 묘사도 섬뜩하다. ‘부부강간’을 당하고도 행복한 아내인 양 살아가는 여성, 게이들이 술집에서 모욕과 위협을 당하는 장면은 오늘날 소수자들의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더 가슴 아프다. 행복은 멀고 좌절은 가깝다. 극 중 배우들은 연극이 뭘 할 수 있느냐며 자조한다. 의대를 포기하고 연극을 해보겠다는 이를 단호하게 말린다.

음울한 작품은 아니다. 날카로운 유머와 풍자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현대적인 디테일을 잘 살려서 깨알 같은 재미를 준다. 뒤늦게 커밍아웃하고 성소수자 축제에 참여했다가 혐오범죄에 희생된 아버지의 삶을 추적하는 여자, 그 아버지의 옛 연인으로, 젊을 땐 성소수자 혐오에 용감하게 맞섰지만 나이 들어 ‘분노하지 않는 꼰대’가 된 남자, 그의 남편으로 패셔너블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전형적인 게이’를 재현한 듯한 남자가 부딪히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와이프’는 현실의 억압을 비판하고 소외된 이를 위로하는 ‘연극의 힘’을 말한다. 폭력보다 강한 사랑의 힘을 말한다. 사나운 세상에서도 ‘와이프’의 퀴어들은 의연하게 살아간다. 그들의 이야기가 세대를 넘어 전해지면서 단절된 줄 알았던 인물들이 연결되고, 그들이 다 전하지 못한 사랑과 연대가 재조명되는 순간이 뭉클하다.

연극 ‘와이프’. ⓒ글림컴퍼니 제공
연극 ‘와이프’. ⓒ글림컴퍼니 제공
연극 ‘와이프’ 출연진. ⓒ글림컴퍼니 제공
연극 ‘와이프’ 출연진. ⓒ글림컴퍼니 제공

배우들이 주고받는 대사량이 어마어마하다. 몇 마디만 놓쳐도 이어지는 맥락을 따라가기가 어려울 수 있어 퍽 집중을 요한다. 번역극이다 보니 정서적으로 낯선 대사들, 번역투의 대사들도 아쉽다. 좁은 소극장에서 165분간(중간 휴식 15분 포함) 앉아 있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다. 좋은 번역극은 언제나 반갑지만, 이 땅의 여성과 퀴어들의 현실을 생생하게 포착한 작품을 더 보고 싶다. 그래도 여섯 배우의 열연에 금세 몰입하게 된다. 특히 이 작품으로 연극에 처음으로 도전한 소녀시대 수영은 다양한 여성을 생동감 있게 연기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19년 서울시극단이 처음 무대에 올렸고 지난 2020년 재공연됐다. 제56회 동아연극상 작품상·연출상·신인 연기상 3관왕에 올랐다. 3년 만에 돌아온 이번 시즌은 신유청 연출의 지휘 아래 박지아, 김소진(수잔나 역), 김려은, 최수영(데이지·클레어 역), 정웅인, 오용(피터·58세 아이바 역), 이승주, 송재림(로버트·28세 아이바 역), 정환, 홍성원(에릭·카스 역), 신혜옥, 표지은(마조리 역)이 출연한다. 2월 8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U+스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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