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첫 미디어아트 전문 미술관
아트센터나비 23년간 이끌어
여성작가 모임 ‘미디어 소녀’ 첫 전시 개최

“미디어아트, AI 시대 변화 예견...
교육도 확장해 대중에 더 다가갈 것”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과 미디어 아티스트인 민세희 전 경기콘텐츠진흥원장을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아트센터나비에서 만났다. ⓒ송은지 사진작가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과 미디어 아티스트인 민세희 전 경기콘텐츠진흥원장을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아트센터나비에서 만났다. ⓒ송은지 사진작가

노소영(62) 아트센터나비 관장은 한국 미디어아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 4층에 있는 ‘아트센터나비’는 국내 최초 미디어아트 전문 미술관이다. 내년 설립 24주년을 맞는다. 그간 기획자만 200여 명을 배출했고,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미디어아트 전문 미술관이 됐다.

주목받는 한국 여성 미디어아트 작가들이 여기 모였다. 지난 14일 개막한 ‘생성세대(生成世代)_Generation that Generates’ 전시다. 챗 GPT, 3D 프로그램 등을 활용해 가상과 실재를 넘나드는 작품들 사이를 걷고 뛰며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다. 여성 미디어작가 커뮤니티 ‘미디어 소녀’의 첫 전시다. 기울어진 기술 중심 미디어 환경 속 들리지 않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키우고자 지난 8월 결성된 모임이다. 경기콘텐츠진흥원장을 지낸 민세희(47) 작가를 포함해 11인이 전시에 참여했다.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과 미디어 아티스트인 민세희 전 경기콘텐츠진흥원장을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아트센터나비에서 만났다. ⓒ송은지 사진작가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과 미디어 아티스트인 민세희 전 경기콘텐츠진흥원장을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아트센터나비에서 만났다. ⓒ송은지 사진작가

노 관장은 “미디어아트 예술가들은 기술과 사회 환경 변화에 민감하고, 그러한 변화를 빨리 경험하고 온몸으로 이야기하는, 어찌 보면 ‘선각자’ 같은 이들”이라고 했다. “미디어아트 작가들이 선사하는 이미지가 낯설 수 있지만, 우리는 이미 낯선 세계에서 살고 있어요. AI(인공지능) 같은 기술이 우리 생활에 이렇게 깊이 들어온 적 없었잖아요.”

“그렇다고 사람들이 기술을 잘 모르면 뒤처진다며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민세희 작가가 말을 이었다. “회화, 애니메이션 등 작업을 하다가 AI의 등장에 자신감 하락을 겪는 분들이 많아요. 그렇지 않게 사회가 지탱할 여지를 마련해 줘야죠.”

민 작가는 데이터 시각화와 머신러닝 전문가다. MIT 센서블 시티랩 연구원, TED 펠로, 구글 아트&컬쳐 작가, 랜덤웍스 대표로도 활동했다. 노 관장은 “시사적이고 의미 있는 이슈를 다룬 데이터 작업을 통해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하는, 열려 있고 유연하고 포용적인 작가”라고 했다. 

2005년 아트센터나비 직원으로 몸담았던 민 작가는 올해부터 이곳에서 기술 관련 교육·세미나도 진행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하고 성장할 기회를 주는 것도 미술관의 중요한 기능이지요. 아트센터나비는 기술 기반 작가들이 만날 기회가 드물던 시기부터 중요한 플랫폼이 돼 줬어요.” 

글로벌 미디어아트 시장이 급성장하며 우리 정부와 지자체도 관련 콘텐츠 제작·산업 투자·지원을 늘리는 추세다. 노 관장과 민 작가는 예술가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순 지원사업만 늘리기보다 “예술 현장과 기술·산업을 연결하고, 그 결과물이 유통·소비될 시장까지 이어지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시장이 없는데 작가만 키우면 뭐하나요. 작품을 만들어도 팔 데가 없으면 정부에 계속 의존하게 될 뿐이지요.”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이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아트센터나비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송은지 사진작가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이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아트센터나비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송은지 사진작가

기술 혁신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공존하는 시대,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도 중요하다. 아트센터 나비는 미디어아트, AI 등 기술을 활용한 문화예술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해 왔다. 초등학생부터 시니어까지 전 연령대를 아우른다. 

“60대 이상은 기술을 마냥 어려워하실 것 같죠? 오히려 가장 열정적이에요. 최근 이미지 생성 AI ‘달리(DALL·E) 2’를 활용해 시화를 만드는 교육을 열었어요. 어르신들이 글을 쓰면 AI가 그에 맞춰서 그림을 그려주는데 너무 재미있어하시더라고요. 이런 프로그램을 더 확장해 나가고 싶어요.”

아트센터나비가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진행했던 예술 참여형 사회공헌 프로그램 ‘프로젝트 아이(I)’도 더 확장하고픈 사업으로 꼽았다. 차상위계층 아동·청소년, 탈북 청소년 등이 미디어 예술가들과 함께 예술을 체험하며 자신의 창의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한 탈북 청소년은 순두부 가게 간판 사진을 찍어 왔어요. 북에 두고 온 모친이 순두부를 좋아해서 생각났다고. 그런 식으로 자기 얘기도 안 하던 아이들이 점점 감정을 드러내고 적극적으로 변해갔어요. 겁이 나더군요. 지속 가능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교육을 넘어 이 아이들이 직업도 얻고 미래를 그릴 수 있을까? 수년간 고민하고 국내외 사례를 조사하다가 적절한 방과 후 학교 모델을 찾았어요.”

2018년 방문한 아르메니아의 청소년 디지털미디어 교육기관 ‘투모(TUMO)’에서 답을 찾았다. 12~18세 청소년은 여기서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게임개발, 그래픽 디자인, 로봇 개발, 프로그래밍 등 다양한 교육을 무료로 받을 수 있다. 국가 주도 공공 인프라가 아닌, 아르메니아인 부부가 세운 민간 교육재단의 투자로 설립, 운영되는 기관이란 점도 독특하다. 일본, 러시아, 프랑스 등 여러 나라들이 벤치마킹하고 있다.

노 관장은 “한국판 TUMO를 운영하려면 매년 30~40억원이 드는데 지금은 감당이 안 돼 못하고 있다”면서도 “교육이 사람을 바꾸고, 교육이 기회를 준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펴낸 저서 『미디어 아트와 함께한 나의 20년』(북코리아)에서 “창의성이 중요한 인적 자산으로 떠오른 21세기, 예술은 사회 안에서 이전과는 다른 역할을 할 것”이라며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는 관조와 반성이라는 전통적 역할 외에, 여러 사회 문제에 직면해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타진하거나, 창의 산업의 생산적 요소”로 작동하길 기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SK, ‘계약 종료 미술관 비워달라’ 소송에
“퇴거 요구는 불합리...개인과 기관 달라
열심히 일했는데 잘못 살았나 싶어”

저서에서 그는 “아트센터 나비의 20년은 나 자신을 찾고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며 “미디어아트라는 작은 입구로 들어가서 헤매다가 정체성, 특히 기술 시대의 인간 정체성이라는 광활한 출구로 나온 것 같다. 이제는 가야 할 곳이 좀 더 뚜렷이 보인다”고 썼다. “미래 뮤지엄은 더욱 적극적으로 사회적 가치를 실험하고 소통할 필요가 있다”며 “콘텐츠 창조가로서 개인의 역량 증대,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통한 혁신의 허브, 사회적 약자를 포용하는 복지의 핫 스팟, 평생교육의 장, 지속 가능성의 촉진자, 나아가 지역의 정체성과 사회적 단합을 위한 큰 사랑방 구실을 하는 소프트파워 역할”이라는 비전도 제시했다.

정작 아트센터나비는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지난 4월 건물주인 SK이노베이션은 최태원(63) SK그룹 회장과 이혼소송 중인 노 관장 측에 미술관 퇴거를 요구하며 부동산 인도 등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불합리하죠. 개인과 기관 활동은 다른 건데.... 기관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이 (관장으로) 와야 하나 생각할 정도로요. 그렇다고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노 관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누구의 부인이어서 시작한 것도 있지만, 상황이 바뀌니까 못 하게 하는 것도 좀 불합리하다.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 위치에서 내 역할을 다했을 뿐인데, 열심히 살아왔고 시키는 일을 열심히 했는데 이런 상황이 되니까 내가 잘못 살았나 생각이 많이 들죠.”

노 관장은 “결정이 나올 때까지는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 활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트센터나비는 오는 2025년 5월 말 제30회 국제전자예술심포지엄(ISEA)을 처음으로 서울에서 연다. 파리, 바르셀로나를 거쳐 서울에 오는 대규모 국제 행사로 서울시, 서울대 등이 함께한다. ‘생성세대’ 전시는 오는 21일까지 열린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