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선의 문화이야기] 전무송-전현아 부녀가 함께 출연한 연극 ‘더 파더’

우리들의 아버지는 여러 얼굴로 기억되곤 한다. 내가 어렸을 때 무척이나 나를 예뻐했던 아버지, 중년 시절에는 큰 소리도 치고 호령도 하던 힘센 아버지,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여기저기서 힘도 잃고 밀려나 점차 측은해지는 아버지, 그래도 고집만은 살아있어서 자식 말은 들으려하지 않는 불통의 아버지. 사랑만 하자니 어떨 때는 밉기도 하고, 미워하자니 이제는 불쌍한 감정이 드는 우리들의 아버지이다. 추석 명절 때 만났던 여러분의 아버지는 안녕하셨는지. 여기 안녕하지 못한, 앞으로도 안녕할 수 없는 아버지의 얘기가 추석 연휴 기간에 무대 위에 올려졌다.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지난 9월 19일부터 10월 1일까지 공연했던 연극 ‘더 파더’(The Father) 얘기다. 

ⓒ스튜디오 반
ⓒ스튜디오 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2년 전 국내에서 상영되었던 같은 제목의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안소니 홉킨스와 올리비아 콜맨이 주연했던 영화 ‘더 파더’의 여운은 오래도록 남아있다. 영화 ‘더 파더’도 치매에 걸린 노년의 아버지와 그를 돌보는 딸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 그 속에서 드러나는 갈등과 사랑과 슬픔의 얘기를 담은 영화였다. 영화에서는 치매에 걸려 기억들이 뒤엉켜 버리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되버린 혼란을 겪으며 무너져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안소니 홉킨스가 너무도 실감나게 연기했다. 그래서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과 각색상을 받는 등 여러 국제영화제에서도 수상하고 호평을 받았다.

연극도 영화와 같은 원작이다. 영화의 감독이기도 했던 플로리안 젤러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연극 또한 주목받아 여러 상을 받았다. 2012년 파리에서 상연되어 몰 리에르 어워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고 그 뒤 런던과 브로드웨이에서도 상연되며 토니상과 올리비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화와 연극 모두 같은 원작에 바탕했기에 스토리 라인은 다르지 않다. 영화에서 나왔던 주요 장면들이 무대 위에서도 그대로 나온다. 영화를 한번 봤던 사람에게는 같은 장면을 연극에서는 어떻게 다루는가를 비교하며 보는 것도 관람 포인트가 된다. 연극에서는 가용 가능한 장치들이 적기에 연출의 효과가 영화에 비해 떨어질지 모른다고 얼핏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연극에서 더 극적인 효과가 나오는 장면들도 적지 않다. 

ⓒ스튜디오 반
ⓒ스튜디오 반

예를 들어 딸과 동거하는 피에르(양동탁)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 앙드레(전무송)를 위협하며 공포를 자아내는 인물이다. 연극에서는 앙드레가 겪는 불안과 공포심을 표현하기 위해 조명과 음악 등에서 긴장을 고조시키는 무대 효과들이 연출되곤 한다. 눈 앞에서 벌어지는 연극의 장면들은 스케일은 작지만 영화 이상의 긴장감을 전해준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상황인지 앙드레의 환각인지는 불분명하다. 피에르는 딸 안느(전현아)과 함께 있을 때는 온순한 사위 같은 모습을 하다가, 단 둘이서만 있게 되면 “주변 사람들을 언제까지 고통스럽게 할 것인가”를 따져 물으며 “시설로 보낼 것”이라고 위협한다. 두 가지 모습의 피에르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는 앙드레에게만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다. 연극을 보는 내내 관객들도 겪게 되고, 끝내 모른 채 공연장을 나가게 되는 의도된 혼란이다. 

이러한 혼란은 연극이 아버지 앙드레의 시선에서 전개되기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관객들은 치매에 걸린 사람의 눈에는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 가를 함께 경험하게 된다. 딸 안느의 극진한 돌봄 노력에도 불구하고 앙드레의 치매 증상은 시간이 갈수록 악화된다. 과거에 있었던 일과 현재의 일이 분간되지 않고, 사람에 대한 기억이 뒤죽박죽 뒤바뀐다. 딸은 피에르와 함께 런던으로 이사해야 한다고 앙드레에게 말했지만, 잠시 후에 나타난 딸은 자기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앙드레는 집으로 찾아오는 간병인을 착각하고, 사고로 죽은 작은 딸을 살아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항상 시계를 차고 시계가 어디로 갔는지 찾는데 집착하지만 정작 제대로 시간 구분을 하지 못한다. 공간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간병인들과 계속 문제가 생겨 할 수 없이 딸의 집에 가 있으면서도 앙드레는 자기 집이라고 착각한다.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는 한복판에서 앙드레는 자기가 겪은 일이 실제인지 환각인지를 알 수가 없어 괴로운 혼란에 빠지곤 한다.

그렇다고 앙드레가 속절없이 자기를 내려놓았을까. 자존심을 갖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아무도 쉽게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앙드레 또한 자기가 치매에 걸린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자기가 다른 곳에 놓은 시계를 다른 사람이 가져갔을 것으로 의심하여 책임을 전가한다. 처음 온 간병인에게 자기가 과거에 무용수였다거나 마술을 할 줄 안다는 식의 거짓말 허풍을 떤다. 자기가 착각을 하고서도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앙드레는 그런 방식으로 허물어져 가는 자존심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치매는 의지로 이겨내는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병이 아니던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앙드레는 갈수록 엉망진창이 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스튜디오 반
ⓒ스튜디오 반

결국 앙드레는 앞날에 대한 불안과 공포, 그리고 수치심과 고통 속에 갇히게 된다. 시간과 공간과 사람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뒤엉켜버린 의식 세계 속에서 그는 괴로워한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한계 상황에 직면한 앙드레는 묻는다. “대체 나는 누구요.”

결국 요양시설의 보호사 앞에서 아이의 모습이 되어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는, 늙고 힘없는 아버지 앙드레. 슬프게 흐느끼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된다. 아기로 태어나서 결국 저렇게 다시 아이의 모습이 되버리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기실 얼마나 유약한 것일까. 그런데 그런 인간들이 모여사는 세상은 왜 이렇게 난폭하고 거칠기만 한 것일까. 마치 세상이 온통 자기 것인 양, 권력과 부와 출세의 욕망에 도취되어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삶을 돌아볼 계기를 던져주기도 하는 작품이다.

주인공 앙드레 역을 맡은 전무송은 섬세한 감정 표현으로 안소니 홉킨스와도 같은 출중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곧 배우 생활 60년을 맞는 전무송은 최근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이 공연이야말로 오랫동안 경험해서 얻어진 내 능력 가지고 해낼 수 있는 공연이 아닌가? 그러니까 여기에 최선을 다해보자”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실제 딸인 전현아가 연극 속의 딸로 출연했다. 전현아는 “사실은 연습하는데 실제 저와 역할이 자꾸 겹쳐지니까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 토로했다. 연극 속에서 치매 아버지를 돌보는 딸 전현아의 얘기이다.

“갑자기 ‘산불’(차범석 작, 1962)의 김노인이 떠오르네요. 세상 모르고 "에미야 밥 다오" 반복하는 김노인에게 양씨가 "아이고 저 망령 난 늙은 노인이 죽지도 않는다"고 하는 장면요. 기억이 사라지고, '나'가 사라지는 알츠하이머 치매 겪고 있는 화자.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함께 보시면서 '이런 혼돈 이런 혼란 속에 있구나. 그렇다면 나(가족)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해야 할까', 이런 생각을 좀 가질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더 파더’ 프로그램 북 인터뷰)

ⓒ유창선 작가
ⓒ유창선 작가

치매는 그 자체로 육체적 고통을 수반하지는 않지만 인간에게 사실은 가장 슬픈 병이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병이기 때문이다. 치매에 걸린 사람은 뇌 속에 저장되어 있던 기억의 정보들이 삭제되고, 의지에 상관없이 자기 본래의 모습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나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꿔놓는, 정체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 치매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게 되고, 자식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되니 이렇게 슬픈 병이 어디 또 있겠는가. 하지만 치매에 걸렸다고 해서 그 사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분명 사람은 달라졌지만,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은 여전히 우리 앞에 남아있다.

우리 사회에서 치매 인구가 90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노인 10명 가운데 1명 꼴로 치매 환자가 된다는 애기이다. ‘더 파더’가 진한 감동을 주는 이유는 더 이상 영화나 연극 속의 얘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앙드레라면 어떻게 될까”, “내가 안느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하게 만든다. 특별한 사건도 없이 그저 일상의 얘기들만 이어진 연극이 가장 슬프고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