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평소 심지가 굳고 독립적으로 보이던 그가 그런 전형적인 러브 스토리에 휘말려 있다니. 도대체 사랑이 뭐기에. 속으로는 나쁜 놈, 못된 놈이라고 욕을 하면서 내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이랬다. “측은지심도 사랑이지요”

온갖 시시껄렁한 주변 잡사를 늘어놓으면서 왜 한 번도 사랑이나 성 이야기는 하지 않는 거냐고 딴죽을 거는 독자를 만났다. 듣고보니 그렇네. 하지만 알았다고 해도 별 수 없다. 뭐 꼬투리가 있어야 말을 하지.

그렇게들 로맨스인지 불륜인지 사랑 이야기가 넘치는 세상이라는데 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또래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트렌드인 데다, 성 이야기도 그렇지, 초록은 동색이라고 어떻게 된 게 나나 친구들은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특기요 취미라는 음담패설 하나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족속이다. 딱히 고상한 척 하는 것도 아닌데.

하긴 20대 때부터 그랬지 싶다. 내가 직장을 다니던 중 결혼하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 남녀를 불문하고 선배들은 어떻게든 성 이야기를 끌어내서 놀려먹고 싶어 했다. 그래, 어땠어, 신랑이 잘해줘? 정도의 점잖은 수준에서부터 왜 그렇게 피곤해 보여? 어젯밤 잠을 못 잤나보네 등. 지금의 기준으로야 거의 고전적 담론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지만 당시로선 그 정도도 맥시멈 급이었다.

그런데 이 새댁이 눈 동그랗게 뜨고 내뱉은 말. 아니, 밥 먹는 거나 섹스나 똑같은 건데 그게 무슨 이야깃거리가 되나요? 그 방면에선 역전의 용사들이었던 선배들이 으∼악 한 건 물론. 몇 년 후 직장을 그만 둘 때까지 내 앞에선 음담패설의 ㅇ자도 꺼내지 못했다(선배님들 죄송합니다).

얼마 전 어떤 후배가 요즘 여성들 사이에서 성담론이 아주 무성한데 선배로서 이런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에 나한테 묻지 마라, 난 밥이나 섹스나 똑같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오늘 아침에 보리밥 먹었건 쌀밥 먹었건 그게 무슨 이야깃거리라고들 거품을 물고 떠들어대냐고 일축했다. 그랬더니 이 똘똘한 후배, 바로 그런 이야기를 글로 쓰면 재미도 있고 도움이 될 거라고 부추겼지만 난 나이든 여자는 뭘 모른다고 욕 먹일 일 있냐? 그 이상 할 말도 없고 하기도 싫다면서 뒷걸음쳤다.

사랑 이야기도 그렇다. 분명히 물불 모르고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르기까지 한 화려한 전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사랑에 대해서 말할 건덕지가 별로 없다. 언제부터인가 티격태격 알콩달콩이 전부인 로맨스 영화는 돈을 줄 테니까 보라고 해도 보기 싫다. '러브 스토리'를 보면서 펑펑 울던 왕년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이렇게 목석 같은 인간으로 변신해 버린 나로서는 셋이나 되는 아이들이 하나같이 척척 연애를 하는 걸 보면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그리고 다른 엄마들처럼 자식들 짝을 찾아 주려고 노심초사할 일도 없다며 혼자 좋아하고 있다(말은 바로 하자. 내가 그런 노력을 할 것 같아?).

그런데 이런 내가 일주일 전부터 '도대체 사랑이 뭐기에'라는 화두에 사로잡혀 있다. 나의 단골 미용실의 미용사 덕분이다. 파마도 염색도 안 하는 나는 오로지 머리를 깎으러 한 달에 한 번 우리 동네 미용실을 드나든다. 나는 몇 년을 다녀도 거의 눈인사만 나누는 데면데면한 고객인데 그날 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주 민감한 말을 먼저 건넸다. 언젠가 40대를 훌쩍 넘어 보이는 그가 다른 고객과 나누는 말 중에 아직 결혼을 안 하고 어머니와 함께 산다는 말이 떠올라서였다. 고객이라곤 나밖에 없었던 탓이기도 했다.

웬 주책이었을까. “결혼은 안 하세요?”라고 묻다니. 그도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드라마로 쓰면 24부작쯤 되는 내용이었다. 지금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 나이도 많고 아이도 둘이나 되는 남자다. 그림을 그린다. 생활력은 없다. 여러 여자를 거쳐 자기를 만났다. 하루 종일 가위질을 해서 번 돈을 그에게 바쳤다. 그러나 번번이 자신의 믿음을 배반한다. 그래서 밉다. 떠나고 싶다. 하지만 떠나기엔 그가 불쌍해 보이고 돈도 아깝다. 자기가 떠나면 또 다른 여자에게 피해를 줄 것 같다. 자기가 그 남자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어찌하오리까.

평소 심지가 굳고 독립적으로 보이던 그가 그런 전형적인 러브 스토리에 휘말려 있다니. 도대체 사랑이 뭐기에. 속으로는 나쁜 놈, 못된 놈이라고 욕을 하면서 내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이랬다. “측은지심도 사랑이지요”

아무튼 이번 달 내 머리는 유난히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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