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비’ 스틸.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바비’ 스틸.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그레타 거윅 감독의 영화 ‘바비'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가 세웠던 기록을 앞지르며 세계적인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 영화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바비랜드’에 살던 바비가 현실세계와 이어진 포털의 균열을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바비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현실 세계를 여행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영화는 그리고 있다. “바비도 결국 완벽하지 않아도 되고, 약해도 되고, 괴로워도 된다는 것, 그래도 바비는 바비라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는 그레타 거윅의 메시지가 반향을 일으킨 결과이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는 ‘바비’의 흥행이 부진한 편이다. 국내 개봉 한달이 지났지만 이제는 박스 오피스 10위권 밖으로 밀려났고 100만 관객에 도달하기가 힘겨워 보인다. 북미 지역에서의 선풍적인 인기와는 대조적이다. 왜 그럴까 궁금해서 사이트에 들어가서 살펴봤더니 여자 평점이 9.23인데 반해 남자 평점은 6.13에 그치고 있다. 성별 관람추이를 보니 여자 75%, 남자 25%로 여성 관객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다. 남성 관객들의 호응과 유입이 저조하여 흥행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유는 짐작된다. 이 영화에 ‘페미니즘’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바비’에는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적 사고에 대한 풍자들이 담겨있다. 하지만 남성을 적대시하는 것도 아니고 페미니즘을 일방적으로 주장하지도 않는다. 어떤 주장을 하기 이전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의 정체성을 숙고할 것을 여성들에게 주문하고 있다. 남녀 간의 대결보다는 통합의 메시지를 담은, 온건한 페미니즘 성향의 영화라 할 수 있다. 

영화 ‘밀수’ 스틸컷. ⓒNEW
영화 ‘밀수’ 스틸. ⓒNEW

그런데도 이런 정도의 메시지도 불편해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영화의 흥행을 위해서는 페미니즘을 피해가야 한다는 말은 또 다른 영화 ‘밀수’에서도 나타난다. ‘바비’에 비하면 괜찮은 흥행 성적을 기록하고 있지만 ‘밀수’를 향해 던져지는 ‘페미 영화’ 아니냐는 시선도 여전히 흥행의 걸림돌로 거론되고 있다. 김혜수, 염정아 같은 여성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영화이니 ‘페미’라는 꼬리표가 역시 따라다닌다. 영화에서라도 여성들이 주인공이 되고 이기면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이러다 보니 한국에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려면 ‘페미’는 피해가야 할 지뢰가 되버린 느낌이다. 남녀 간의 대결을 부추기는 것도 아니고, 단지 여성들이 스토리 라인의 중심에만 있어도 ‘페미’ 소리를 듣지 않을까 신경써야 한다면 이는 과잉 반응하는 사회의 모습이다. 여성들이 겪는 문제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역차별’을 말하며 젠더 분열을 부추겨온 일부 정치인들의 책임도 크다. 아무리 ‘이대남’들의 표가 급했던들, 그렇게 남녀 갈라치기를 조장할 일은 아니었다. 정치의 역할은 갈등을 조정하는데 있는 것이고 이는 젠더 이슈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양성평등을 넘어 남성과의 대결 일변도로 가는 근본주의적 페미니즘도 ‘페미’에 대한 조건반사적 반감을 낳는데 영향을 주고 있음도 돌아볼 필요는 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공원에서 벌어진 성폭행 사건 피의자 최 모씨가 19일 서울 관악구 관악경찰서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법원으로 송치하고 있다. ⓒ뉴시스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공원에서 벌어진 성폭행 사건 피의자 최 모씨가 19일 서울 관악구 관악경찰서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법원으로 송치하고 있다. ⓒ뉴시스

슬픈 것은 영화에서조차도 ‘페미’가 금기어가 되는 현실에서, 여성들은 여전히 잔혹한 폭력 앞에 노출되어 있는 광경들이다. 서울의 공원 야산에서는 대낮에 흉기에 맞고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 사망하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 초등학생인 친여동생을 5년간이나 협박하며 성폭행을 일삼아 재판에 넘겨진 20대 남성에게 검찰이 징역 15년을 구형했다는 기막힌 소식도 들려온다. ‘역차별’ 당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렇게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은 여전히 약한 위치에 처해있다. ‘페미’ 소리를 부담스러워 해야 하는 영화계의 모습과 폭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여성들의 상황이 어쩐지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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