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한 영화 읽기]
유머·재미·여성 연대에
‘남성 해방’ 메시지까지
페미니즘 받아들일 준비 안 된
남성들도 포용하는 쉬운 ‘교육 영화’

영화 ‘바비’ 스틸.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바비’ 스틸.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관람’보다 ‘체험’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영화가 있다. 익숙한 대학가 극장에서 또래 여자들과 함께 보는 ‘바비’도 그랬다. 엘리베이터가 열릴 때마다 이전 회차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이 커다란 포스터를 든 채 쏟아져 나오고, 다음 회차를 예매한 사람들이 기대에 찬 얼굴로 빈자리를 채운다. 만석의 극장 안에서 삼삼오오 속삭이고, 같은 장면에 같은 이유로 크게 웃고 침묵하고 후련해하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들.

그날의 ‘바비’는 행복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놀이동산 같았다. 여느 영화제의 최고 기대작을 예매하는 데 성공한 승자들끼리 만족스럽게 관을 나설 때 떠도는 무언의 도취감에 비견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다른 고민도 남는다. 이 다정한 일체감과 안도 서린 즐거움을 즉각 체감할 수 없거나, 혹은 목격하길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말로 ‘바비’의 탁월함을 설명할 수 있을까?

영화 ‘바비’ 스틸.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바비’ 스틸.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공감은 힘이 강하다. 냉철한 시네필을 자처하는 사람도 분명 자기만의 ‘미워할 수 없는’ 영화가 하나쯤 있을 것이다. 여아의 임파워링에도 섭식장애에도 일조했던 인형의 문화사적 명암을 훌륭하게 비틀어 재창조된 페미니즘 코미디를 보고 동시대인 여성으로서 애착을 품는 것은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다.

게다가 ‘바비’는 객관적으로도 똑똑하게 설계된 영화다. 인류사 내내 이어진 성 불평등을 정확히 조준하는 안티테제가 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가 ‘영화이기만’ 한 영화들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서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닌가. 아무 메시지도 담지 않고 다만 영화로서 아름답기 위한 영화가 그 목적을 달성하기는 비교적 쉽다. 반면 시끄럽고 반동적인 메시지를 발화하기 위한 영화가 가볍고 우아한 동시에 재미까지 있기는 어렵다. 그런데 그레타 거윅은 그 어려운 작업을 해냈다.

그가 ‘바비 월드’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바비의 입을 빌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최초의 바비, 시대착오적인 미를 구사하는 바비는 자기를 이미 앞질러 가 더 많은 것을 깨우친 ‘이상한 바비’와 인간 소녀 사샤가 어떤 적의를 품을지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아직 깨어나지 못한 바비들을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모두를 구하기 위해 돌아온다. ‘프란시스 하’에서도 묘사된 ‘파티에서 갑자기 눈을 마주치고, 서로가 이번 생의 유일한 이해자임을 깨닫는’ 여자들 사이의 애정 어린 연대가 바비 월드에서 재연되는 셈이다. 바비의 거울상인 인간 여성 글로리아의 스피치와, 바비들이 켄에게서 분리된 상태에서만 가부장제의 세뇌에서 벗어나는 장면도 메타적 재미를 선사한다.

영화 ‘바비’ 스틸.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바비’ 스틸.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바비’ 스틸.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바비’ 스틸.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거기에 바비들은 여자들만의 밤에 남자를 들일 필요가 없어 내쫓아 버리지만 켄들은 눈요깃감이 돼 줄 바비를 반드시 끼고 노는 장면, “저만 힘없는 남자인데 그럼 저는 여자인가요?”라고 순진하게 묻는 마텔 사 인턴, “여자는 모두에게 미움받아. 남자든 여자든 여자를 싫어해. 그게 유일한 공통점이야!”라는 사샤의 한 서린 일갈까지. 일일이 언급하기 어려울 만큼 촘촘히 삽입된 유머만으로도 풍자극으로서의 역량과 의의가 충분히 입증된다.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이 유머가 정교할수록 불편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여성의 삶을 경험한 적 없어 쉬이 감응하지 못할 사람들이 걱정될 즈음, 현실 세계에 당도한 켄이 의사·변호사·투자가가 되려 하다가 자격 미달로 거부당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남성도 높은 기준을 맞추지 못하면 권력의 세계에 편입되지 못한다는 ‘맨박스’의 개념을 아주 친절히 설명하는 것이다. 현실 세계의 남성은 ‘알파메일’이 되지 못했다는 열패감 탓에 여성에게 굴절 분노하는 일이 흔하지만, 바비 월드의 켄은 결국 가부장제가 말(horse)보다도 지루한 발명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결말에서는 켄을 완성해 줄 바비를 공급받기를 기다리지 말고 켄 자신만을 위한 삶을 찾아 자존의 숭고함을 누려보라는 바비의 다정한 충고까지 곁들여진다. 그레타 거윅이 지닌 경이로운 수준의 인내심과 슬픈 소망이 동시에 느껴지는 장면이다.

영화 ‘바비’ 스틸.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바비’ 스틸.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바비’ 스틸.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바비’ 스틸.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컨셉트가 영화보다 크다’고 느낀 평론가와 그에 열광적으로 호응한 많은 남성은 당연히 이 영화에 ‘즉각’ 공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영화가 두 시간 내내 낱낱이 해체하고 놀리고 무력화시킨 (그럼에도 결국 상냥하게 격려해 준) 대상에 더 강한 소속감을 느꼈으리라. 여성들이 조롱받은 세월이나 수위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이 순한 놀림이었지만, 아무튼 한국에서 나고 자란 성인 남성들이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타자화돼 상처받은 마음은 안타까이 여긴다. 숱한 남성들이 관람 후기에서 얼결에 인정했듯 자신이 이렇게 쉬운 내용을 못 알아들을 거라고 짐작하고 설교하려 든다는 생각에 ‘심통’이 났을지도 모른다. 평생 ‘맨스플레인’을 겪어온 바라 그 억울함 역시 마음 깊이 이해한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라는 의미도 재미도 없고 단 한 줌의 지성도 느껴지지 않는 공허한 구호에 노출된 사람이라면 다들 알지 않는가. 어떤 이들에겐 정말로 그렇게 쉽고 직설적이고 반복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바비’는 예술을 예술로만 보자며 고고하게 선을 그은 이들 대신 그 귀찮고 힘든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총대를 멘 영화다. 같은 가치를 믿는 사샤와 글로리아와 바비들을 위무할 뿐만 아니라, 대등한 공존을 포기한 켄들을 버리지 않기로 결심하고 가르치고 설득하는 역할까지 놓지 않은 착하고 온건한 영화.

찰리 채플린부터 켄 로치와 다르덴 형제까지, 앞서갔던 숱한 영화들이 말해주듯 영화는 ‘컨셉트’의 전파에 가장 효과적인 매체가 될 수 있다. 캠페인이 되는 것 그 자체를 목적 삼을 수도 있다. 그러니 ‘영화는 영화로만 접근해야 하는데 ‘바비’는 그러지 못했다’는 논거를 다시 한번 돌아보자. 혹시 그건 지극히 목표에 충실했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영화의 직관적인 리얼리즘을 트집 잡아, 나머지 성취까지 가혹하게 평가하고 싶다는 반발심의 솔직하지 못한 표현은 아닐지 되묻고 싶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