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예능 ‘사이렌: 불의 섬’ 스틸.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예능 ‘사이렌: 불의 섬’ 스틸. ⓒ넷플릭스 제공

“정말 예쁜 공주님이다….”

아이돌 가수가 반짝이는 미니 드레스를 입고 공중그네 위에 앉아 있었다. 조카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네 살 무렵부터 공주에 열광하기 시작하더니 화려하게 치장한 여성만 보면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옆에서 듣던 내가 ‘공주병이 들었다’고 혼잣말하자, 엄마가 불쑥 끼어들었다.

“너도 저만 할 때 그랬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다. 생중계하는 미스코리아 선발 대회를 넋 놓고 지켜봤다. 지금 생각하면 미인대회 자체가 여성 혐오적인 건 말할 것도 없고 아름다움이란 주관적인 개념인데 누가 제일 아름다운가 우열을 가리는 게 코미디다. 그러나 그 시절의 나는 지금의 조카처럼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어렸다.

‘아름다움의 신화에는 한계가 없다’고 했던 사회 비평가 나오미 울프의 논평처럼 미디어는 한계가 없는 미의 기준을 세우는 데 앞장서 왔다. 더 어리고, 더 마르고, 더 완벽한 미인을 보여주는 게 미디어가 존재하는 이유인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미디어는 갈수록 세분되고 고도화되는 미의 기준을 조장하고 그 기준을 따라잡은 여성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그런데 지난 5월 여성들이 민낯에 경찰복, 소방복, 군복, 운동복을 입고 등장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선을 보였다. 출연자들은 한곳에 모이자마자 갯벌을 기기 시작했다. 온몸이 진흙으로 범벅이 돼도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오직 이기기 위해서 현업에서 쌓은 노하우, 긴 시간 갈고닦은 능력, 자부심, 용기를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이렇게 혁신적인 콘텐츠가 등장하기까지 새로운 화법으로 시청자에게 말 걸기를 시도한 콘텐츠와 이에 꾸준히 반응을 보인 이들이 있었다. ‘골 때리는 그녀’, ‘운동뚱’, ‘노는 언니’, ‘피지컬100’에 출연한 여성들이 길을 터주었기 때문에 사이렌이 나온 것이다.

넷플릭스 예능 ‘사이렌: 불의 섬’ 스틸.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예능 ‘사이렌: 불의 섬’ 스틸.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예능 ‘사이렌: 불의 섬’ 스틸.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예능 ‘사이렌: 불의 섬’ 스틸. ⓒ넷플릭스 제공

그런데 사이렌은 단순히 강한 여성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강한 정신력과 체력이 요구되는 직업에 종사하는 일반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무대에 올렸다는 점에서 한층 진일보한 콘텐츠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여성이 경찰, 군인, 소방대원, 운동선수, 경호원 등의 직업을 선택하는 게 이례적이라고 인식한다. 이러한 직업군에 종사하고 싶은 여성은 시작부터 높은 장벽을 넘기 위해 도전해야 하고 힘겹게 직업인이 되고도 무용론 따위로 공격당한다. 동시에 능력을 입증해 보라는, 같은 직업을 가진 남성은 받지 않는 요구에 시달린다.

사이렌은 이런 직업군의 여성이 얼마나 강하고 유능한지 보여주겠다고 선언하듯 팀을 나눠서 경쟁하며 그들만의 드라마를 만든다. 여기서 연출의 영리함이 돋보이는 대목은 남성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여성의 능력을 십분 보여줬다는 점이다.

남성 출연자가 등장해서 남성과 겨루면 여성은 결국 남성의 대조군이 되어 싫든 좋든 여성을 연기할 수밖에 없다. 남성 못지않게 활약하고도 손 쓸 수 없는 신체 능력의 차이나 불리한 조건으로 남성이 최종 승자가 되는 걸 지켜보기만 한다. 이런 사례는 기존의 서바이벌 예능에서 수없이 반복되곤 했다.

5월24일 열린 넷플릭스 예능 ‘사이렌: 불의 섬’ 제작발표회에 참여한 각 팀 리더들. (왼쪽부터) 스턴트팀 리더 김경애, 군인팀 리더 김봄은, 소방팀 리더 김현아, 경찰팀 리더 김혜리, 운동팀 리더 김희정, 경호팀 리더 이수련. ⓒ넷플릭스 제공
5월24일 열린 넷플릭스 예능 ‘사이렌: 불의 섬’ 제작발표회에 참여한 각 팀 리더들. (왼쪽부터) 스턴트팀 리더 김경애, 군인팀 리더 김봄은, 소방팀 리더 김현아, 경찰팀 리더 김혜리, 운동팀 리더 김희정, 경호팀 리더 이수련. ⓒ넷플릭스 제공

사이렌은 그동안 남성 출연자가 독점하다시피 하던 역할을 전부 여성이 맡는다. 여기에 개성 강한 여성들이 팀으로 하나 되어 연대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이는 일면 프로파간다적인데, 내가 어렸을 때는 물론이고 지금의 어린 조카조차 접할 수 없었던 거의 최초의 프로파간다라고 할 수 있다. 흠 없이 아름다운 여성의 이미지에 지친 우리에겐 강하고 유능한 여성을 조명하는 프로파간다가 필요했다.

고모를 볼 때마다 왜 머리가 남자처럼 짧은 건지 궁금해하는 조카에게 사이렌을 보여줘야겠다. 그리고 말해주겠다.

“저것 봐, 저 힘세고 멋진 언니도 머리가 짧잖아.”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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