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대, 민변 문화예술스포츠위원회, 블랙리스트이후(준), 한국작가회의,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등 9개 문화예술단체가 지난 18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앞에서 '블랙리스트 실행자 오정희씨를 내세운 문체부·대통령실·대한출판문화협회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이후 계획 발표 기자회견'을 열었다.  ⓒ송경동 시인 제공
문화연대, 민변 문화예술스포츠위원회, 블랙리스트이후(준), 한국작가회의,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등 9개 문화예술단체가 지난 18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앞에서 '블랙리스트 실행자 오정희씨를 내세운 문체부·대통령실·대한출판문화협회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이후 계획 발표 기자회견'을 열었다. ⓒ송경동 시인 제공

지난 14일 서울국제도서전 개막식장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을 때 나는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다. 송경동 시인이 대통령실 경호처 직원에게 팔다리를 잡혀 끌려 나갔고 문화연대와 블랙리스트이후(준) 활동가가 역시 끌려 나가며 비명을 질렀다. 이 상황은 만장하신 해외 귀빈 여러분 앞에서 펼쳐졌다. 싱가포르에서 온 추리소설 작가 부부와 말레이시아에서 온 평론가가 내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무슨 일이냐면, 2015년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작품활동을 하거나 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 문화예술인을 사찰해 명단을 만들었다. 당시 문화체육관광부는 대통령 비서실로부터 이 명단을 전달받았다. 이 명단에 오른 문화예술인들은 창작지원기금을 받지 못하거나 공연에서 제외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생업에 위협을 받았다. 오정희 작가는 당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소위 위원이자 위원장 직무대행으로서, 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굳이 들여다보고, 이미 선정된 문학 지원 대상자 중 최소 30명을 배제하도록 지시했다. 오 작가는 이 일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으며 지금도 침묵하고 있다.

문화연대, 블랙리스트이후(준), 한국작가회의, 한국민예총,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영화계블랙리스트문제해결을모색하는모임, 우리만화연대,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등 8개 단체는 도서전이 열리기 전부터 문체부와 출판문화협회에 반대의견을 전달했다. 문체부와 출협은 오 작가를 홍보대사 6인의 가운데에 세운 채 도서전을 강행했다. 8개 단체는 지난 14일 코엑스 동문 앞에서 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나는 전날 저녁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대표 메일로 보도자료를 받고 황급히 투표로 회원 작가들의 허락을 받아 대표로 기자회견에 참여했다.

기자회견은 평범하게 진행됐다. 송경동 시인이 난데없이 발언을 시켜서 엉겁결에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깃발을 펼쳐 들고 발언해야 했다. 보도자료와 기자회견 일정도 전날 저녁에 보내더니 예정에도 없던 발언을 시키고 정말이지 문화연대 약간 원망한다. 발언을 시작하면서 머릿속 한구석에서 우리 작가님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작품 발표 기회가 제한되거나 기금 지원에서 배제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다.

기자회견 후 참가자 모두 개막식장으로 향했다. 코엑스와 도서전 관계자들 요청에 따라 문화연대 참가자들은 기자회견에 사용했던 피켓을 말거나 접어서 글자가 보이지 않게 들고 있었고, 정정당당하게 입장권을 구입해 다른 관람객들과 함께 줄 서서 입장했다. 도서전 개막식장에 난입하지 않았고, 어떤 불법적 행위도 하지 않았다.

‘2023 서울국제도서전’에 부스로 참가한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정보라 작가 제공
‘2023 서울국제도서전’에 부스로 참가한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정보라 작가 제공

과학소설작가연대는 도서전에 부스를 냈다. 부스에 들러 독자들과 만나던 나는 송 시인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B1홀에 갔다. 들어갔을 때는 비명과 고성이 울려 퍼지고 송 시인이 끌려 나가고 있었다. 당황해서 멍하니 있다가 에이전시 실장님에게 붙잡혔다.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고 매우 안전한 거리에서 상당히 비겁하게 그저 보고만 있었다. 송 시인께 몹시 죄송하다.

나중에 싱가포르 작가 부부와의 식사 자리에서 뒷얘기를 들었다. 개막식을 보려고 들어갔는데 고성이 오가고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이 여성 작가에게 한국말로 뭐라고 했다고 한다. 두 분 다 한국어를 못 했고, 여성 작가는 당황해서 대충 옆으로 비켰다. 나중에 보니 자기가 한국 대통령 부인 옆에 서 있는 사진이 신문 기사를 장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싱가포르 작가들은 도서전에 왔다가 코리안 퍼스트 레이디하고 사진도 찍었다고 기뻐하며 돌아갔다. 나도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척하고 그냥 개막식장에 들어갈 걸 그랬다.

18일엔 원래 도서전 폐막행사로 열릴 예정이던 홍보대사 6인 강연이 취소됐다. 말레이시아 여성 평론가는 혹시 연사들이 모두 여성이라 강연이 취소됐냐고 몹시 걱정했다. 나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를 설명하고, 논란이 커지고 당사자가 사퇴해서 강연 진행이 혼란스러워지니까 도서전 측에서 취소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말레이시아 평론가는 안심했다.

그러나 나는 “여성이라서 문제가 생겼는가”라는 질문을 계속 다시 생각하게 됐다. 개막식 기자회견 중 정윤희 블랙리스트이후(준) 디렉터가 “오정희를 포함해 홍보대사 6인을 모두 여성으로 채운 것은 문체부와 출협에 면죄부가 되지 못한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지적이다.

한국 문단에서, 최소한 순문학계에서 문학을 평가하고 작가의 경력을 키우거나 꺾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 남성이다. 반면 SF를 포함한 장르문학은 이런 문단 권력, “신춘문예 몇 년도 등단”이나 “어느 작가님께 사사”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내가 기자회견에 참가하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너무 잘나서가 아니라 그저 국문학 전공도 문예창작 전공도 아니고 신춘문예나 문예지 추천으로 등단하지도 않았고 한국의 모든 정통적인 순문학 공동체와 대체로 아무 상관 없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여성이 신분에 관계 없이 자유롭게 글을 읽고 쓸 권리를 갖게 된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여성이 스스로 말하고 기록하고 그 기록을 가치 있는 작품으로서 후대에 남길 권리를 갖게 된 지 백 년도 채 되지 않았다. 한국 순문학계에서 여성 작가가, 같은 여성이며 보기 드문 선배 여성 작가에게 공개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홍보대사 6인을 전부 여성으로 선정하면서 거기에 오 작가를 포함한 문체부와 출협의 의도가 정말 야비한 것이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와 관련해 무슨 일이 일어나면 곧바로 “여자의 적은 여자” 따위 논리를 들고나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오 작가가 블랙리스트 사태 가담과 실행에 대해 인정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은 것은 분명 잘못이다. 도서전 중도에 말없이 사퇴한 것도 비겁한 행태다. 이미 모든 홍보물에 오 작가의 얼굴이 들어가 있고 도서전은 한창 진행 중인데, 사퇴해 봤자 현실적으로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애초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 자체를 오 작가가 혼자 고안해 실행하고 진두지휘했는가? 2015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 발발 당시 김종덕 문체부 장관도, 블랙리스트를 문체부에 넘긴 김기춘·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도 모두 남성이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를 포함해 박근혜 정부 당시 민간인 사찰을 고안하고 진두지휘하고 가담했던 남자들, 그런 권력을 가졌던 남자들은 도서전 개막식에서는 전부 여성 작가 등 뒤에 숨었다.

살기 편해서 너무 좋겠다. 참 부럽다.

18일 도서전 폐막식 기자회견 보도자료를 보니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가 문화연대의 블랙리스트 반대 운동 주최 단체 중 하나로 올라가 있었다. 애초 회원 투표 사안은 개막식 기자회견 참석뿐이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황급히 투표를 실시했다. 우리 회원들이 나 때문에 정치적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는 걱정과 두려움도 함께 전달했다. 동료 작가들은 “같이 블랙리스트 오르자”는 투지로 가득한 답변을 내놓았다. 투표 결과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는 문화연대의 블랙리스트 반대 운동에 연대 단체로 참여하기로 했다. 우리 작가님들 몹시 자랑스럽다.

이것은 문학 창작자, 나아가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이 자유롭게 일할 권리를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창작자의 노동은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상과 감정과 표현은 검열받지도 사찰당하지도 않아야 한다. 일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글 쓰고 살아갈 권리를 위해 나는 계속 투쟁할 것이다.

세계적 권위 문학상 ‘부커상’ 국제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가 우리 사회 곳곳의 차별과 폭력에 대한 저항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월간데모’로 독자들을 만납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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