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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미 변호사

법무법인 덕수

최근 양심적 사유를 들어 병역을 거부한 동성애자의 변호를 맡게 되었는데, 이 친구가 내 옆지기에게 선물이랍시고 '젤' 류의 물건을 하나 건네주었다. 그걸 전해받은 내 옆 지기 멋지게 한번 써봐야겠군 하면서 유쾌하게 웃어 넘겼지만 그 웃음 뒤에는 한없는 너그러움으로 포장된 냉랭한 무관심이 숨어 있었다. 나 역시 이러저러한 인연으로 매력적인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똑같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옆지기의 그 냉정함이 못내 서운해 밤늦게 눈웃음쳐 가며 그 친구를 변호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하여 항변해 봤건만 옆지기 왈 “동성애 그거는 성적 기호이고 유전적으로도 그럴 수 있으니 그리 살면 되고, 양심적 자유 운운하며 군대 안 가겠다는 거, 그럼 감옥 가야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된 소외계급이나 소수자의 길은 사회적 합의로 제도적 해결책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하나, 본인 스스로 선택한 소수자의 경우에는 본인의 몫이라는 거다.

정말 자칭 회색분자다운 얘기로만 일관한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소수자란 '힘없는''보호받지 못하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경우를 말할 것이다. 이는 개량적 수치로서 결정짓는 것도 아닐 것이며, 평면적 이분법으로 나누어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현대사회의 복잡한 매트릭스 계층구조 속에서는 세상 모든 이가 최소한 한 분야에서만큼은 '멸시와 고통'을 당하는 잠재적 소수자일 수밖에 없다.

멸시·냉소 등 인권 낙제점

사회가 점점 살기 좋아지는지 판단하는 좋은 잣대가 바로 소수자의 인권문제인데, 우리사회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그들에게 물어보면 당근 낙제점이다. 그냥 다를 뿐인데,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똑같은 사람은 없는데.

차이를 인정하면 그 순간 새로운 인간관계가 만들어진다. 얼마 전 이름 때문에 소송 붙은 한 트랜스젠더의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내 속의 어머니의 마음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놀란 적이 있다.

화려한 상업적 성공 뒤에 감춰진 고통과 인고의 세월을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기 어렵고 고통스러운 길을 외로이 걸어온, 또 걸어갈 소수자 중 소수자인 그녀, 그러나 그녀는 나보다 훨씬 여성스럽고 아름다웠으며 인간적으로 성숙된 사람이었다. 그런 모습을 바로볼 수 있어 감사했다.

여성은 거대 소수자집단

성적으로 차별이나 학대를 당한 경우 자신 또한 다른 이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잠재적 성향이 무의식중에 표출된다는 프뭐시기의 학설은 여성의 감수성과 대지와 같은 포용력을 이해하지 못한 낭설임을 나는 확신한다.

그 '무엇'을 달고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원죄로 내 호칭이 변호사가 아니고 꼭 '여자'변호사로 불리는 것을 보면 여성은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소수자집단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차이' 인정하는 열린 사회 희망

속된 표현으로 과부사정 홀아비가 안다는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지구나라 과반수 '야당'인 여성당 당원동지들이 생리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다양한 소수자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애환을 함께 느끼고 포용하며 해결책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을까 한다.

탄핵정국 이후의 삶에 대해 많은 희망이 교차되는 지금 우리 사회가 소수자들이 다수들과 별 무리 없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열린 사회가 될 수 있기를 또 한 번 염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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