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3년 4개월 만에 판결 논란
피해자 진술 신빙성 놓고 결과 갈려
함장은 파기 환송, 소령은 무죄 확정

3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해군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대법원 선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홍수형 기자
3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해군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대법원 선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홍수형 기자

성소수자인 부하 여성 장교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해군 영관급 장교 2명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갈렸다. 해군 대령에게 군사법원이 내린 무죄 판결이 대법원에서 유죄 취지로 파기됐다. 반면 같은 피해자를 여러 차례 성폭행·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소령에게는 무죄가 확정됐다. 한 명의 피해자가 입은 일련의 사건을 두고 대법원 재판부별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달리 판단한 것이다. 피해자 측은 “이해할 수 없는 반쪽짜리 판결”이라고 재판부를 규탄했다.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군인 등의 강간치상 혐의로 기소된 함장(대령)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던 원심을 깨고 사건의 2심을 맡았던 고등군사법원으로 되돌려보냈다. 반면 같은 혐의로 기소됐던 포술장(소령) B씨에 대한 상고는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가 기각하며 무죄가 확정됐다. 해당 재판부는 피해자 C씨의 진술에 신빙성이 부족한 정황이 있으며, 혐의를 확실히 증명할 수 없다고 상고 기각 이유를 설명했다.

사건은 지난 2010년 발생했다. B소령은 2010년 수개월 간 직속부하였던 장교 C씨를 10여 차례 성추행하고 2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C씨가 신상면담에서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밝혔지만, B소령이 “네가 남자를 잘 몰라서 그런 거다. 가르쳐 주겠다”며 성폭행했다고 말했다. 당시 함장이던 A대령은 C씨가 피해 사실을 알리자 상담을 빌미로 협박한 뒤 성폭행을 저지른 혐의를 받는다. 군 검찰은 2017년 C씨의 고소로 수사에 착수해 두 사람을 재판에 넘겼다.   

1심은 A대령, B소령의 혐의 사실을 인정해 각각 징역 8년,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무죄로 뒤집혔다. 

3년 6개월 만에 재판이 열린 대법원에선 재판부별로 판단이 갈렸다. 같은 피해자를 상대로 한 연결된 범죄이지만 진술 신빙성 등을 기초로 달리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대법원 1부는 “C씨 진술은 수사기관에서부터 법정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고 경험의 법칙에 비춰 비합리적이거나 진술 자체로 모순되는 부분이 없다”며 A대령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유죄취지로 파기환송했다. 

반면, 대법원 3부는 “두 사건의 구체적 경위, 피해자와의 관계, 피해자 진술 등이 서로 달라 신빙성이나 신빙성 유무를 기초로 한 범죄 성립 여부가 달리 판단될 수 있다”며 “원심 판결에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은 잘못이 없다”고 판단했다.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는 이날 대법원 판결 직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해할 수 없는 반쪽짜리 판결”라고 비판했다.

공대위는 “이번 대법원 판결은 이 사건의 피해자는 물론이고 군대를 성평등한 상식의 공간으로 바꾸고자 한 피해자의 용기 있는 발걸음을 무력화시킨 오판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밝혔다.

사건을 대리한 박인숙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는 “2심 판결을 봤을 때 두 가해자들은 말을 맞추는 서로 돕는 관계”라며 “이런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않고 두 사건을 따로 보고 하나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고 또 다른 하나는 부정하는 것은 심히 부당한 판결”이라고 규탄했다. 박 변호사는 “오히려 이런 사건 경우 병합해 한 재판부가 제대로 판단할 수 있도록 했어야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며 “동떨어지지 않은 하나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신빙성을 인정하고 하나는 부정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피해자는 대법원 판결 소식에 다시 절망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입장문을 통해 “파기 환송 소식에 잠시 희망을 가졌지만 결국 다시 절망 속에 빠졌다”며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성적 소수자라는 점을 알고서도 강간 강제추행을 일삼고 결국 무죄로 판단한 대법원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규탄했다.

이어 “제가 겪어야만 했던 그날의 고통들을 그 수많은 날들의 기억을 신빙성이 부족하다며 인정하지 않은 법원의 판결을 저는 이해할 수 없다”며 “파기환송과 기각이 공존하는 판결로 오늘의 저는 또 한 번 죽었다. 행복한 군인으로서 살아보고 싶은 저의 소망을 또 한 번 짓밟혔다. 부디 저의 후배들은 저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길 바란다”고 민했다.

최희봉 젊은여군포럼 공동대표도 “이번 판결은 사건 피해자뿐 아니라 군에서 신고하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성희롱,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는 절망이고 군 변화의 희망을 가졌던 국민들에게는 악몽 같은 소식”이라며 “대법원은 오늘 가해자는 반드시 단죄하고 피해자는 살아남는다는 군의 정의구현 교두보를 무너뜨려 버렸다”고 발언했다. 최 공동대표는 “이제 남은 절차는 군의 대응”이라며 “성희롱, 성폭력은 전장에서 전우에게 총구를 겨누는 이적 행위처럼 군 조직을 와해시키므로 이 사건의 가해자 상관에 대해서 군의 엄정한 징계 규정으로 단죄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다음은 피해자 입장문 전문. 

3년을 넘게 기다렸습니다.
파기환송 소식에 잠시 희망을 가졌지만, 결국 다시 절망 속에 빠졌습니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성적소수자라는 점을 알고서도 강간과 강제추행을 일삼고, 결국 중절수술까지 하게한 자를 무죄로 판단한 대법원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제가 겪어야만 했던 그날의 고통들을, 그 수많은 날들의 기억을 신빙성이 부족하다며 인정하지 않은 법원의 판결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파기환송과 기각이 공존하는 판결로 오늘의 저는 또 한 번 죽었습니다. 행복한 군인으로서 살아보고 싶은 저의 소망을 또 한번 짓밟혔습니다. 

부디 저의 후배들은 저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피해를 입었더라도 생존자로 살아남기를, 기다림의 시간이 이처럼 길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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