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선의 발언] 길 잃은 젠더 정치와 여성할당제
[유창선의 발언] 길 잃은 젠더 정치와 여성할당제
  • 유창선 평론가
  • 승인 2021.05.17 09:30
  • 수정 2021-05-17 15: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올해 들어서면서 한 일간지에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한 새로운 필진 12명의 프로필이 지면에 소개되었다. 무심하게 페이스북에 링크를 걸었더니 댓글이 달렸다. “여성은 한 사람도 없네요.” 평소 양성평등의 지지자라고 믿었던 나도, 그런 댓글을 접하고 나서야 “아, 여성이 한 명도 없네”, 그럴 정도로 둔감했던 것이다. 얼마 전에는 어느 유력 대선 주자의 지역 캠프 발족 사진을 페이스북에서 보았다. 수십명의 참석자들 가운데 여성은 단 두 명만 눈에 띄었다. 한 명도 없는 것 보다는 나은 경우였겠지만, 검은 양복 입은 남성들의 단체 사진들은 종종 우리의 숨을 막히게 한다.

ⓒ파피에
ⓒ파피에

“역사에서 여성은 남성이 없을 때만 모습을 드러낸다”고 로잘린드 마일스가 『세계여성의 역사』에서 말했듯이, 역사 책에 이름을 남긴 여성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곳에 더 많은 여성들이 자리하지 못하는 것 뿐 아니다. “여성들은 세계 곳곳에서 자녀를 돌보고, 우유를 짜고, 밭을 갈고, 빨래하고, 요리하고, 청소하고, 바느질하고, 환자를 치료하고, 죽어가는 사람 곁을 지키고, 죽은 자를 땅에 묻었다”라는 로잘린드 마일스의 말은 여성들이 살아온 역사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지만, 결코 평가받지 못하는 노동은 모두 여성들의 몫이었던 현실은 부조리한 차별의 역사였다. 불과 백수십년 밖에 되지 않은 여성 선거권의 실현도 지난했던 여성 참정권 투쟁의 산물이었다. 그나마 양성평등을 위한 이 정도의 법적·제도적 개선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세상의 절반이면서도 그 역사에 존재할 수 없었던 여성들의 오랜 투쟁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 나선 이준석 전 미래통합당 최고위원이 폐지를 공약했다는 여성할당제도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정치구조에서 여성들의 진출을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여성할당제였다. 그에 얽힌 여성들의 땀과 눈물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정권을 잡겠다는 야당의 당대표를 하겠다고 나설 수 있을까. 여성할당제 문제 뿐만 아니다. 4.7 재보선 이후로 '이남자'(20대 남자)들의 편향적 대변자 역할을 하고 있는 이준석의 언행은 무척 생뚱맞다. 그는 민주당의 보궐선거 패배 이유를 "2030 남성의 표 결집력을 과소평가하고 여성주의 운동에만 올인하다 나온 결과"라는 허구에서 찾고 각종 반(反)페미니즘적 주장들을 쏟아내고 있다. 대부분이 ‘남초’ 사이트에서나 등장하는 여성 차별적 주장들이라, 정치적 담론으로 상대하기조차 민망할 수준의 것들이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 ⓒ뉴시스
이준석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 ⓒ뉴시스

사실 이런 문제는 국민의힘 내부에서 정리되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남자’들과 여성들의 시선을 동시에 의식하며 우물쭈물하는 모습만 보였다. 젠더 문제에 관심 자체가 없고 해결의 필요성도 절박하지 않은 50~60대 남성들이 주도하는 정당의 한계였다. 그러는 사이 페미니즘과 싸우는 투사가 된 이준석은 ‘이남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당대표 경선 여론조사에서 약진한데 고무된 모습이다. 물론 국민의힘만 문제는 아니다. 이준석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온 얘기들이 ‘이남자’들의 관심을 받자 민주당 정치인들도 남녀평등복무제, 군 가산점제 부활, 군 복무자 예우법 제정 등을 쏟아낸다. 민주당이 여성주의 운동에만 올인했다던 이준석의 말이 거짓이었음도 이내 드러난 셈이다.

정치가가 할 일은 남성과 여성이 함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데 있지, 남성과 여성의 편을 갈라 편싸움에 올라타는 일이 될 수 없다. 정치가는 대중들과 발을 맞춰야 할 때도 있지만, 어떤 경우도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판단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분명한 것은 이준석류의 정치인들은 여성들이 살아온 삶의 역사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젠더 정치를 가르치려 한다. 리베카 솔닛의 경구가 그들의 눈에 들어올까 모르겠다.

“남자들은 아직도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그리고 내가 알고 그들은 모르는 일에 대해서 내게 잘못된 설명을 늘어놓은데 대해 사과한 남자는 아직까지 한 명도 없었다.”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유창선 시사평론가 ⓒ여성신문
유창선 시사평론가 ⓒ여성신문

*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사가 마음에 드셨나요?

여성신문은 1988년 창간 이후 여성 인권 신장과 성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해 온 국내 최초, 세계 유일의 여성 이슈 주간 정론지 입니다.
여성신문은 여성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여성의 '안전, 사회적 지위, 현명한 소비, 건강한 가족'의 영역에서 희망 콘텐츠를 발굴, 전파하고 있습니다.
저희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좋은 기사 후원하기를 해주세요.
여러분의 후원은 여성신문이 앞으로도 이 땅의 여성을 위해 활동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여성신문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