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보면 끝이 있겠지요 - ‘29년생 김두리’ 구술생애사] 9화. 징병을 피하려 산골로
김두리 여사는 제 할머니입니다. 할머니의 삶을 기록하는 것은 할머니처럼 이름 없이 살아온 모든 여성들의 삶에 역사적 지위를 부여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역사 연표에 한 줄로 기록된 사건들이 한 여성의 인생에 어떤 ‘현실’로 존재했는지, 그 잔인하고 선명한 리얼리티를 당사자의 육성으로 생생히 전합니다. - 작가 말 -
시집온 지 두 해 만에 할아버지[시아버지] 돌아가셨지, 또 느그 할아버지[남편] 군인[강제징병] 영장이 나왔는 거야. 그때는 영장이 나와도 사람만 앤 비면(보이면) 몬 찾아서 앤 데리고 갔다니까. 그래가지고 군인 피한다꼬 사던(살던) 살림도 그양 내삐고(내버리고), 우선에 살 거나 쪼매 가지고 어디 꼴짝(산골)에 드가서(들어가서) 숨어서 앤 살었나.
우예(어떻게) 됐노 하면, 그 전에 경주에 현곡[경북 경주시 현곡면] 거 사다가 덕정[경북 영천시 고경면 덕정리] 글로(그리로) 이사를 먼저 왔다. 느그 증조부님[시아버지] 삼형제 중에 덕정 거 둘이나 살고 있으이. 거 사는데, 그때 삼촌[시삼촌]이 징용 영장이 나왔는 거야. 근데 이 어른이 마 달러가뿌고(달아나버리고) 없는 거야.
달러가뿌고 없어놨디, 또 느그 할배를 델고 갈라 하는 거야. 그때 느그 할배가 나무하러 가뿌고 없었어. 오새(요새) 같으면 집에 오지 마라꼬 전화로 했으면 안 오지. 그랄 낀데 안 올 수가 없잖아. 나무를 해서 지고 오니까, 면서기하고 동장하고, 그때는 구장이라 했다. 구장하고 면서기하고 와서, 집 앞에 바랐고(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내가, 나무 처박아놓고 옷 갈아입고 간다꼬 그랬지. 그래놓고 느그 할배한테 마 뒷 머시로[뒷문으로] 모르게 나가라 했잖아. 내가 좀 꾀가 많은 택(셈)이지. 뒷산으로 올라가 뿌래라(버려라) 해놓으니까, 느그 할배 옷도 갈아입지도 안 하고 그양 올라갔다.
[집에서] 안 나온다고 구장이 와서 찾아보디만 없어놨디, 어데로 갔다꼬 찾고 생난리를 지기데(치데). 그래가지고 시어머니캉(랑) 나캉 실컷 다았지(당했지, 혼이 났지).
“어데로 갔는지 모르나!”
그 사람들 내(계속) 있다가 해 빠져서(져서) 어덥까(어두울 때) 갔더라꼬. 저거도 배도 고프고 해놓이 가뿠다. 느그 할배는 그래 산에 숨어 있다가 저녁에 내려왔데. 내르와가 옷 갈아입고 밤에 느그 진외가(아버지의 외가, 할머니에겐 친정)로 갔잖아. 밤에 가서 숨어 있었다.
그래 숨어 있다가, 할 수 없이 꼴째이(산골)로 들어갔다. 다시 여(여기)는 살 수 없으니까. 느그 할아버지하고 작은할배[시동생]하고 증조모님[시어머니]하고 내하고 네 식구가. 면서기들이 와서 살피고 도다가(돌아가) 저녁답(저녁때) 되면 가뿌거든. 아쉬븐(아쉬운) 거 있으면 밤으로 모르게 집에 내르가서 아쉬운 거 한 가지씩 갖고 오고, 그래 살았다니까.
양식도 어드메 친한 사람들 연줄 연줄 해가지고 어더븐(어두운) 밤에 가서 곡석(곡식) 한 말씩 팔아서[사서] 가와서(가져와서) 묵고, 산에 가 나물 뜯어서 묵고, 고생했는 거 말할 수도 없다. 방을 쪼매는(조그마한) 거 하나 얻어서 네 식구가 한테(한데) 자고.
거서(거기서) 밑에 누가 밭을 쪼매난 거 하나 줄 테니까 집을 지으라 하데. 느그 할배하고 작은할배하고 증조모님하고 서이드르(셋이서) 흘로(흙을) 이어 담을 쳐서 집을 지었다. 나는 내들(내내) 산으로 나물 해오고. 아침에 해와서 삶어서 낮에 묵고, 또 점심 묵고 가서 나물 뜯어와서 저역(저녁)에 묵고, 이따 아직(아침)에 또 묵고. 내들(내내) 산에 나물 뜯으러 댕겼다.
그래 꼴짝에 집을 만드는데, 그때는 난리판이고 니 것 내 것도 없고 하니까 두 형제가 댕기며 나무(남의) 산에 가가지고 모르게 남구(나무)를 비다가(베어다가) 막집으로 지었어. 그래도 방 두나(둘) 부엌 하나 삼칸지기(삼간 집)로 만들었는 거야.
그럴 때 느그 큰아버지[첫째 아들]가 섰는 거야. [작가 : 산에 도망가 있을 때 임신하신 거예요?] 그래. 본대 우리 집에 왔다 갔다 했잖아. 꼴짝에 숨어 있다가 밤에는 한번씩 내려오지. 잠도 자고 갈 때도 있고.
가뜩이나 입덧해서 못 먹는데다가 아무것도 물(먹을) 것도 없으니까 내가 힘이 있을 택(턱)이 없지. 죽을 판 살 판 산으로 댕기면서 나물로 뜯어가지고 묵고, 참꽃[먹는 꽃이라는 뜻으로, ‘진달래’를 개꽃에 상대해 이르는 말] 따서 묵고, 송기[소나무의 속껍질] 막대이(막대기) 끊어서 꿀 빨어묵고, 껍디(껍데기) 빼끼(벗겨) 묵고. 그래 세월로 보냈다.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