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햇볕에 바싹 말린 이불을 꿰매려고 마루에 펴놓았다. 내 바느질 솜씨가 영 못미더워 이웃에 사시는 친정 어머니가 오셔서 늘 해주셨는데, 이제 더는 백내장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께 의지할 염치가 없어서 “엄마, 가만 앉아 계세요. 나도 할 수 있어요.” 안 쓰던 존댓말까지 써가며 굳은 각오로 바늘을 손에 쥐었다.

가뜩이나 어설픈 데다가 돋보기 없이 실을 꿰려다 번번이 헛손질을 하자, 언제라도 달려들어 해주실 채비를 하고 지켜보시던 어머니가 어이가 없어 웃으신다.

모녀가 돋보기 쓰고 앉아

결국 돋보기를 찾아 쓰니, “아이구, 내가 오래 살긴 살았나보다. 막둥이 돋보기 쓰는 걸 다 보고…' 쯧쯧 혀를 차신다. 여성 평균 수명 팔십 시대에, 일흔 여섯 어머니와 마흔 넷 딸이 돋보기를 쓰고 마주 앉는 것은 어쩜 너무도 당연한 풍경인지도 모르겠다.

무슨 말을 하려면 단어가 머릿속에서 뱅뱅 돌면서 떠오르지 않는다, 수시로 깜빡깜빡한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 하루가 다르게 흰머리가 늘어난다, 돋보기 없이는 글을 읽기가 어렵다, 아이들한테 잔소리가 많아졌다, 의욕이 없어졌다, 월경이 늦어지면 전에는 혹시 임신이 아닌가 두려웠는데 이젠 폐경이 떠오른다….

강남여성인력개발센터의 전업주부들을 위한 서울시 지원 특화 사업인 '실버시터(silver-sitter)' 강의에서, 노인이 되면 달라지는 것들을 알아보기 전에 “나도 이제 늙었구나”하고 느낄 때는 언제인지, 대여섯씩 둘러앉아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눈 뒤에 돌아가며 발표를 하니 나온 대답들이다.

“맞아, 맞아!” 하며 한바탕 웃고 나서 과연 왜 그런지 공부를 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건망증과 잔소리, 의욕 없음 들은 바로 앞 시간에 나눈 '노인이 정말 싫을 때'에 나온 답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싫어하면서 닮는다고, 못마땅한 노년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길을 그대로 가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흰 종이에 가로로 선을 하나 긋고 맨 왼쪽의 시작점을 0으로, 맨 오른쪽 끝나는 점을 평균수명인 80이라고 하자. 80년 인생을 나타내는 그 선 어디쯤에다가 지금의 내 나이를 한번 표시해 보자.

청년의 때를 보내고 있는 사람을 빼고는 거의 가운데 부분, 아니면 이미 오른쪽으로 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나이 들어가면서도 그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역시 노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며, 그 두려움은 노년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노년을 모르기 때문에 거리감과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늙는 게 두려운 건 모르기 때문

이 거리감과 거부감을 줄이면서 노년을 제대로 볼 수 있으려면, 과연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나는 늘 노인대학에서 만나 뵙는 어르신들을 떠올리면서, 강의 시간에 중년 여성들에게 숙제를 내곤 한다. 어떻게 보면 쉽기도 하고 또 어렵기도 한 숙제는, '마주치는 어르신 관찰하기'와 '마음이 내키면 말 붙이기'이다. 처음에 어리둥절해하던 수강생들이 다음 시간에는 많은 이야기를 가슴에 담아와서는 마음들을 털어놓는다.

멀리서 혼자 살고 계신 친정 어머니 생각이 나서 코끝이 매웠다, 구부정한 허리에 아직도 채소 노점을 하시니 참 힘들고 쓸쓸한 노년인 것 같았다, 지하철에서 어찌나 큰 소리로 떠드시는지 정말 꼴불견이었다, 솜처럼 하얀 머리에 단정한 옷차림이 너무 멋있었다, 노부부가 손잡고 천천히 걸어가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나도 남편과 그럴 수 있을지 솔직히 부러웠다….

어르신 관찰하기와 말 붙이기. 노년을 향해 가장 쉽게 내디딜 수 있는 첫걸음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끼고 느끼는 만큼 받아들일 수 있다. 노년을 받아들이는 일이 바로 노년 준비의 시작이다. 그 일은 지금 바로 여기서 시작할 수 있다.

동네에서,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길에서, 시장에서, 지하철에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책에서 노년을 보자. 그냥 가만히 보기만 해도 된다. 그 안에 내 부모의 노년이 있고, 나의 노년이 있다. 숙제라고 생각하면서 딱 일주일 동안만 한번 해 보면 어떨까…. 노년 준비의 첫걸음은 바로 관심이다.

사회복지사, 어르신사랑연구모임(http://cafe.daum.net/gerontology) 운영 <꽃 진 저 나무 푸르기도 하여라> 저자

함께 보는 영화 속의 노년

~b6-1.jpg

황금 연못

On Golden Pond, 1981 / 감독 마크 라이델 / 출연 캐서린 헵번, 헨리 폰다

여름을 나기 위해 호숫가 별장을 찾은 노먼 할아버지와 에텔 할머니 부부. 소리지르고 화내고 달래고 웃고 입씨름하면서 늘 함께 있다.

하루하루 쇠약해지는 몸과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힘든 노먼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밝고 명랑하고 유머 감각이 뛰어난 아내뿐. 노년에 느끼는 삶에 대한 기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살아온 세월에 대한 회한, 손상된 관계에 대한 후회와 안타까움이 담겨 있어, 노년은 노년대로 젊은 세대는 젊은 세대대로 노년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하는 노년 영화의 대표작.

함께 읽는 책 속의 노년

@b6-2.jpg

나는 주름살 수술 대신 터키로 여행 간다

Juicy Tomatoes / 수잔 스왈츠 지음 / 나무생각, 2002

노년기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서 있는 50대 여성들이 다양한 목소리로 자신들의 온갖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는 책.

50대 이후의 여성들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완숙미를 지니고 있다는 뜻에서 원제가 '완숙 토마토(Juicy Tomatoes).'

나이 드는 것이 무슨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사회에서, 중년과 노년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생각해 보게 한다. 책의 마지막 구절이 참 좋다. '오늘이 나머지 생애에서 가장 젊은 날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