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 박순경 선생을 추모하며

국내 대표 여성 신학자 박순경 선생이 24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사진='고(故) 원초 박순경 선생 통일사회장 장례위원회' 제공
국내 대표 여성 신학자 박순경 선생이 10월 24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사진='고(故) 원초 박순경 선생 통일사회장 장례위원회' 제공

 

원초 박순경은 가부장제 신학 해체를 위해, 민족 분단 해소를 위해 한 획을 그으신 분으로 한국 여성사에서 기억되어야 할 분이다.

박순경 선생이 2020년 10월 24일에 영면하셨다. 선생님의 장례식이 통일사회장으로 드려졌다는 것은 그분의 위치가 한국사회에서는 통일운동가요, 통일신학자로로서 자리매김 됨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는 통일의 족적뿐만 아니라 여성 신학자로서 그분이 교회와 신학계에 끼친 업적과 영향도 함께 기려야 한다.

내가 50년 동안 기독여성운동을 하며 체험한 것은 아무리 사회가 여성권익운동을 해도, 평등사회를 위한 구호와 열정이 종교에 들어오면 맥을 못 춘다는 것이다. 종교가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으로 깊은 늪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성평등을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일반 사회운동 보다 더 큰 열정과 투쟁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종교를 포기하면 그뿐이겠지만, 여성들이 종교 인구의 절반이 넘는 현실에서 종교의 본래정신인 평등, 성평등을 회복하는 것은 가부장제에서 억압당한 여성을 해방하는 길이며, 차별하는 종교인들을 구원하는 길이기도 하다. 종교가 가부장제를 진리로서 고착화하는 그 중심에 가부장신학이 있고, 가부장적 교회 전통이 있다. 그러기에 여성사에서 여성신학자로서 가부장 기독교의 가부장 신학을 비판하고 해체하는 작업을 한 박 선생의 노정은 기억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

△“가부장적 교회 평등한 교회로”

박 선생의 약력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한국여신학자협의회(이하 여신협) 초대 회장과 한국여성신학회 초대 회장이라는 경력이다. 박 선생은 이화여대 교수 시절부터 기독교계에서 굳이 여성 신학자라고 강조할 필요 없는, 조직신학자로서 바르트신학 전문가로 알려졌던 대학자였다. 이 신학자 박순경이 1980년 4월 21일 기독교회관에서 열인 여신학자협의회 창립총회 자리에 나타났다. 본인 말에 의하면 학교에서 이론만 가르칠게 아니라 신학의 현장인 교회여성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첫걸음으로 여신학자협의회 창립총회에 참석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이론적인 신학이 아니라 현장 신학으로 내딛는 첫 행보였다. 아무도 예기치 않았던 박순경 선생의 출현은 창립총회를 열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도 놀라움 그 자체였다.

여신학자협의회는 신학을 공부한 여성들이 가부장적 교회를 평등한 교회로 변혁해보자는 마음으로 결성한 것이다. 총회에서 회원 자격이 문제가 되었다. 여전도사들 중 신학사 학위가 없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박 선생이 “독일에서는 신학을 하는 사람은 그가 목회를 하든, 교수를 하든지 다 신학자라고 부른다, 여러분은 신학을 졸업하고 전도사를 하든지, 교회여성활동을 하든지, 집안에서 살림을 하든지 다 신학자이다. 여러분이 평생 동안 신학에 관심을 가지고 신학을 위해 살기 때문이다. 신학자는 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라고 발언 해 회원 자격 논란을 명쾌하게 정리했다. 박 선생의 이 발언은 신학을 하고 집에서 살림하는 사람들, 신학사가 아니면서 목회를 하는 전도사들,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신학자로서의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저명한 교수로 이름을 날리던 박 선생의 이 발언은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길을 걷는 동지라는 느낌을 갖게 했고, 이심전심으로 박 선생을 여신학자협의회 초대회장로 선출했다.

창립총회 후 여신협은 교회여성들의 의식화와 회원들의 역량강화를 위해 ‘여성과 한국 교회’라는 주제로 첫 공개강좌로 열었다. 박 선생이 ‘세계교회의 여성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주제강연을 하셨다. 요지는 여신학자들이 여성의 눈으로 성서를 읽고 가부장적 한국교회를 개혁하자는 내용이었다. 특히 회원들에게 자극을 준 것은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호칭과 관련된 교회의 가부장성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이후 여신협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이미지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여신협의 회장이 되면서 박 선생은 이론 신학에서 현장 신학을 접목하게 되었고, 여신협 입장에서는 성차별 교회를 평등교회로 바꾸는 교회개혁운동의 중요한 이론적 기반을 조성하게 되었다. 한 예로 박 선생님은 기독교의 핵심 주제인 하나님, 예수, 성령 이외에도 마리아 상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여성신학적 해석을 통해 여성해방의 길을 제시하였다.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했다는 탄생설화에서 동정녀 탄생의 의미를 가부장 질서와 전혀 상관이 없는 새로운 질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등 여성해방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셨다.

1988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은퇴 기념 강연을 하는 박순경 선생.  ©여성신문
1988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정년퇴임 기념 강연을 하는 박순경 선생. ©여성신문

 

△여성신학의 초석을 놓다

1985년에 여신학자협의회의 대학원 출신들이 모여 여성신학회를 만들었고 박 선생이 초대회장이 되셨다. 여성신학회는 여성신학을 기독교학회의 한 전문신학분야로 인정받고 이를 신학계에 펼치기 위해 이 학회에 가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남성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교수와 박사 중심의 이 기독교학회는 “아줌마들이 뭔 신학회냐?”고 무시하며 가입을 일축시켰다. 신학공부를 하고 현장에 있는 사람은 모두 신학자라는 박 선생님의 주장은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몇 년 후에 가입이 되었지만 박 선생님 회장 시절에 끝내 기독교학회 가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대를 볼 줄 몰랐던 한국신학회의 위계적 권위주의와 가부장성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런 멸시를 받으며 시작한 여성신학회는 박 선생이 회장직을 물러날 즈음에는 교계에 여성신학 전문단체로서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여성신학회는 여성과 사회 현장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주제들을 여성의 눈으로 신학화 하며 가부장 신학을 해제하고 평등, 평화 정의를 향한 신학 작업을 하고 있다. 박 선생은 여성신학계를 이끌어 교회의 가부장신학을 깨뜨리는데 모퉁이 돌이 되신 분이다.

△통일신학자로서의 박순경의 여정

박 선생은 통일문제에도 끝없는 관심을 가지셨다. 여신협 초기부터 통일운동에 불을 붙이셨다. 박 선생은 1983년에 <한국민족과 여성신학의 과제>를, 1986년에 <민족통일과 기독교> 라는 통일 서적을 출판하셨다. 여신협은 1987년 제4차 한국여성신학정립협의회를 “통일과 여성신학의 과제‘라는 주제로 열었는데 박선생님이 이 두 책을 중심으로 주제강연을 하셨다. 박 선생에 의하면 분단은 가부장제의 산물이다. 주제강연을 통해서 가부장제와 분단의 관계, 민족분단과 여성의 삶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왜 통일을 해야 하는지를 여성신학 입장에서 제시해주셨다. 이 정립협의회를 계기로 여신협에 통일문제를 다루는 통일신학작업반이 만들어졌다. 이 작업반 결과물이 <민족통일과 여성신학>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이후 여신협과 여성신학회를 비롯한 기독여성단체에서 통일문제가 운동과 연구의 핵심과제가 되었다.

박 선생은 학자로서 민족의 문제, 통일의 문제를 이론적으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통일운동의 일선에 서셨다. 박 선생은 1994년 7월 9-12일 ‘조국의 평화통일과 기독교 선교에 관한 기독자 도꾜회의에서 한 “기독교와 민족통일의 전망’이라는 발제 때문에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여신협을 중심으로 14개 단체들이 ‘박순경 교수 석방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석방활동을 벌였고 ‘박순경 통일신학연구’모임을 매주 열어 박선생의 통일신학을 교계에 널리 알렸다. 석방위원회의 맹렬한 활동으로 구속 4개월 만에 박 선생이 석방되었는데, 1992년에 발간된 『통일신학의 여정』과 『통일신학의 고통과 승리』는 박 선생의 통일신학을 중심으로 구속에서 석방되기까지의 법정기록과 투쟁의 기록이다.

또한 박 선생은 학자로서 범민련 남쪽본부 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범민련 결성에 참여했고, 민족회의, 통일연대,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6.15남측위원회 상임고문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활동들은 박 선생이 일찍 터득한 현장신학의 한 길이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몇 달전 꿈이 뭐냐고 묻는 제자에게 ‘민중해방, 민족해방, 여성해방, 남북통일, 평화통일, 세계평화’라고 하셨다는 원초 박순경, 그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사람들에 의해 그가 꿈꾼 세상이 오리라 믿는다.

공정무역 카페 티트립에서 만난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설립자 한국염 목사. 그는 “이주여성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이주여성과 ‘함께하는’ 운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전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정의기억연대운영위원장 ©여성신문 ⓒ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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