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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든 것을 우리가 쓰자’라는 표어 아래 태극성을 사용하자는 경성방직주식회사의 선전광고. <조선일보>1929.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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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사공장에서 값싼 일당으로 혹사당하는 부녀자들. 〈자료·도서출판 천도문, ‘독립유공자 인물록 및 독립 운동사 총람’, 2001〉▶

〈기획 발굴 신여성〉은 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소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기초학문지원을 받아 연구하고 있는 〈한국여성 근·현대사〉내용을 새로 쓴 것으로 이번호가 마지막회이다. 730호부터 지금까지 총 10회에 걸쳐 연재됐다. <편집자 주>

식민지 시대의 카프 작가인 권환의 〈목화와 콩〉이라는 작품을 보면 이 시기 일제의 농업정책이 농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잘 알 수 있다. 이야기는 군청에서 농민들이 심어놓은 콩을 갈아버리고 목화를 심으라고 강요하는 상황에서 전개된다. 농민들은 이런 상황에서 다음과 같이 반응하고 있다.

“참말이지 관청 사람들 하는 일은 알 수 없더라.”

“그래 그 사람들 심사는 참으로 알 수 없어. 설마 백성을 해 되게는 아니 할텐데.”

그들은 진정으로 ××사람들의 심사를 알 수가 없었다. 언제든지 백성을 위해서 백성을 이롭게 한다고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그렇잖은 것이 그들에게는 이상하였다. 이익은커녕 손해 가는 목화를 기어이 심으라는 것이라든지 뽕나무를 강제로 심으라는 것이라든지(…중략…)또 가마니, 꼬치, 목화를 기어이 공동판매장으로 가져오라는 것 그렇게 헐게 사서 누구를 다 주는지. ××들은 그렇게 비싸게 받아서 다 무엇을 하는지. 그러한 모든 것이 다 그들에게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관청 사람들의 심사를 참으로 알 수가 없었다.

이들의 이런 의문은 “부산이나 서울이나 동경이나 대판에 있는 제사회사, 방적회사의 실 만들고 베짜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또 공동판매장이란 것은 농민들의 편리를 위해 둔 것이 아니고 제사회사나 방적회사들에게 헐케 사주기 위해 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다분히 계몽적인 의도를 지닌 소설 속에서는 농민들이 이를 자각하고 저항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실제 농민들은 이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고 농촌의 빈곤은 더욱 심화돼 갔던 것이다. 얼핏보아 여성의 삶과 무관한 듯 보이는 이 장면은 그러나 여성의 일상사에 매우 중요한 변화를 담지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 그럴까.

식민지 조선, 상품판매 시장 전락

수입물건 소비로 여성 근대체험

19세기 말부터 진행됐던 산업화의 결과, 대량으로 생산되는 물건들, 외부에서 수입된 물건들이 소비되는 과정은 여성의 근대체험을 구체화했다. 개항을 즈음해 다량의 수입물품들이 조선으로 유입되면서 그 이전에는 역관이나 상층양반들만 접할 수 있던 신식물건들이 서민들의 일상생활에도 깊숙하게 들어오게 됐는데, 예를 들어 양장, 양복, 양말, 양화, 양동이, 양은, 양철, 양잿물, 양옥, 양요리 등 서양을 상징하는 ‘양’을 접두사로 사용한 물건들이 그것이다. 이런 물건들은 일상용품으로써 여성들의 생활문화를 크게 바꾸어 놓게 된다.

19세기 말 조선의 풍경을 담고 있는 비숍의 기행문에는 “조선인들이 외제품에 의존하고 있는 정도는 놀랄 만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에게 관찰된 수입 외제품은 여성들의 집안 일을 덜어주는 표백되지 않은 셔츠천, 한랭사, 모슬린, 아마포, 아이들 의복용 터키 레드, 미국산 등유, 성냥 등이었다. 이런 일상용품 이외에 모피, 카페트, 화장품도 수입됐다. 심지어 상류층 사람들은 프랑스식 시계, 독일식 거울, 미국산 담배, 벨벳 덮개 깐 의자, 아프리카산 다이아몬드와 모피를 수입해 사치를 일삼기도 했다. 1886년 6월 28일 〈한성주보〉에 실린 아래 광고는 당시 외국물건의 수입이 얼마나 활발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일상광고(日商廣告). 양목(洋木) 양사(洋紗) 각색양은(各色洋緞) 성적분(成赤粉) 정동(丁銅) 화주동(和州銅) 백동(白銅) 미(米) 율(粟) 곡물(穀物) 차외(此外) 무론모빈도매산매(無論某貧都賣散賣). 폐점이 귀국에서 開市함으로부터 먼저 三港口에 개점하여 점점 興旺하니 진실로 귀국 부인네 자주 돌아봄을 힘입으니 극히 감사하며…

이처럼 수입물품이 다량 증가하고 이에 대한 홍보가 적극 이루어진 것은 조선의 근대화가 외압에 의해 이뤄졌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일본이 조선 경제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조선의 자본 축적에는 무관심했고 다만 그들에게 알맞은 상품 판매 시장인 동시에 원료 공급지로 생각한 결과 구미제품의 중개상업에만 전념했던 것이다.

수입 목면제품, 극빈 여성 생계 막막

일반 여성 편리한 삶 누려

이와 같은 수입물품들이 여성의 삶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 옷감의 예를 들어보자. 원래 삼베, 모시, 명주, 무명의 직조는 여성들의 가내수공업으로 주요 수입원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서양 면제품은 그 파급력이 대단해 1890년대에는 시골의 초동들까지 입게 됐다. 그뿐 아니라 서양면제품의 수입을 통해 의복감이 다양해지면서 자연 디자인의 다양화도 이뤄진다. 이와 더불어 선풍적으로 불어닥친 패션의 혁명은 여성에게 개성을 지닌 개인으로 자신을 느끼게 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대량 수입된 목면은 우리의 가내수공업적 목면제품을 대체한다. 이로 인해 가내 수공업으로 연명하던 농촌여성들의 생계에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이런 현상들 이면에는 여성의 전통적 가내수공업을 대량생산시스템으로 대체하려는 일제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었다. 일제는 조선의 산업화를 촉진시켜 여기서 발생하는 잉여의 이익을 얻고자 했고 그런 이유로 제사, 방직 사업을 발달시켰던 것이다. 식민정책으로 인해 극빈에 이른 여성들은 제사, 방직 공장에서 목숨을 담보로 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앞에 인용한 소설은 이런 사업에 목화를 원료로 공급하기 위한 일제 시책의 한 현장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이를 소비하는 여성들에게는 대량생산된 옷감이 편리한 근대의 산물로 체험됐다. 이외에도 양잿물과 화학 염료의 수입이 빨래의 노동을 줄여줬고 재봉기계의 수입은 바느질에서의 해방을 꿈꾸게 했다. 이런 이유에서 수입물품과 대량생산품의 대중화는 여성들에게 긍정적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시기 여성들은 급격한 생활 변화를 겪으면서 개선, 개량의 안목을 넓히는 의식의 변화를 경험하고, 나름대로 스스로의 삶에 새로운 전망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모든 문화적 현상이 그렇듯 목면의 산업화는 여성들이 처한 위치에 따라 각기 그 체험의 내용이 달랐던 것이다. 그들이 어떤 계층에 속해있느냐에 따라 똑같은 현상이 당근이 될 수도 있었고 채찍이 될 수도 있었다.

변신원/ 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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