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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폭력위기센터 대표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박금자 산부인과 원장은 불법적인 낙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여성의 선택의 폭이 넓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진·민원기 기자>

낙태 불법 부추기는 비현실적 움직임 지적도

올해는 모자보건법이 제정된 지 30주년이 되는 해. 천주교 주교회는 올해를 ‘생명 살리기’의 원년으로 정하고 지난 달 ‘생명31 운동본부’를 발족 ‘낙태·사형반대’를 목표로 모자모건법과 관련한 서명을 받는 등 낙태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다. 특히 지난 2월 ‘생명문화와 낙태모자보건법 14조항에 관한 다각적 검토’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주최, 이 조항의 개정 및 삭제를 논의했다.

천주교를 비롯한 낙태반대운동단체들은 “형법상 낙태죄의 규정은 실효성을 잃었으므로 폐지하자는 주장도 있으나 오히려 합법적인 낙태를 가장한 불법적인 낙태를 막기 위해 사법적 조치는 더욱 강화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 단체는 “헌법상 생명권에 관한 명문규정은 없지만 인간의 생명이 전제되지 않은 자유와 권리는 공허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며 “인간은 분만으로 인해 세상 밖으로 나왔으나 모체 속에 있는 시간과 상황에 따라 차등이 생겨서는 안될 것”이라고 못박고 있다.

낙태를 반대하는 단체들이 모여 지난 94년 결성한 낙태반대운동연합(낙반연)은 산부인과 네트워크를 통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미혼모와 기혼여성의 산전 진료에 관한 상담을 하고 있다. 특히 지난 3월 가톨릭과 낙반연 공동으로 ‘낙태하지 않은 산부인과’를 조사한 결과 전국에 30곳을 넘지 않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낙반연 김혜지 간사는 “하루에도 5건 이상 낙태나 낙태후유증에 관한 상담이 들어온다”며 “한해 낙태수술이 이뤄지는 것은 200만 건으로 94년 공식적인 통계 이후 추정에 불과, 실제로는 250만 건 이상일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김 간사는 “많은 의사들이 ‘임신중절을 하지 않는 병원’으로 공개되는 것을 꺼릴 만큼 낙태수술은 이미 도를 넘어 섰다”며 “원칙적으로 낙태를 금지하기 위해서는 법만으로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법 규정을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행 형법은 임신시기에 관계없이 낙태를 금지하고 의사의 업무상 낙태는 2년 이하의 징역, 부동의 낙태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돼 있다. 현행 모자보건법은 유전병, 근친상간·성폭력 등 불가피한 때에만 제한적으로 인공임신중절을 허용하고 있다. 이처럼 법이 낙태를 금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이미 ‘낙태 천국’이라는 오명을 안고 있다.

고려대 법학과 김일수 교수는 지난 2월 발표한 모자보건법 14조항에 관한 다각적 검토 토론회에서 ‘법학의 측면에서 본 모자보건법 제14조의 문제점’이라는 발제문을 통해 “낙태수술이 급증했음에도 불구하고 낙태가 현실적으로 적발, 처벌되는 예는 극히 드물다”며 “1998년 검찰이 처리한 낙태죄는 총 56건으로 그 중 약식기소가 3건, 나머지는 불기소처분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낙태죄 규율에 대한 검찰과 법원의 사법 소극주의는 모자보건법의 폭넓은 낙태허용기준에 있다”며 “태아에게 미칠 위험을 피하기 위해 태아를 죽이는 것을 허용하는 입법은 비인도적이다”고 주장했다.

한국누가회생명윤리회 박상은 위원장은 ‘생명윤리의 4대원칙에 비춰본 모자보건법 14조의 문제점’에서 “모자보건법 14조 4항 근친상간의 경우, 친족간에 사행위를 한 당사자를 징벌해야지 그로 인해 임신된 태아를 낙태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강간에 대해서도 모든 법적 형벌은 잘못한 사람이 받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아무런 잘못이 없는 아기가 멍에를 짊어져야 하는가”를 반문했다.

낙태 상담 후 선택할 수 있어야

그는 “설령 모체의 건강이 손해를 본다 할지라도 태아의 생명을 살해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은 분명 지나친 일”이라며 “산모의 건강권보다는 태아의 생명권이 더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이들은 생명 우선론(proto-life)의 입장에 서서 태아는 수정 순간부터 인간이며 태아의 생명권이 여성의 이해에 앞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입장에 의해 형성된 견해다. 수정란 이후의 과정은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선을 그어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는 특별한 시점이 없기 때문에 배아와 태아가 생명의 존엄성에서 구별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낙반연 김혜지 간사는 “한 생명을 살리는 데는 많은 시간과 투자가 절실”하다며 “본인이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마음만 있으면 인력과 돈을 들여서라도 도와줄 준비가 돼 있다”고 전한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면서 자취를 하던 김숙경(22·가명)씨는 동거하던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임신사실을 알게 됐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낙태를 결심하고 자신의 상황을 온라인에 띄웠다. 이를 본 낙반연측에서 상담한 결과 그는 ‘부모에게 알려질까봐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고민을 털어놓는다. 낙반연은 그의 출산을 돕기 위해 해외유학프로그램을 신청, 김씨가 미국으로 갔다가 한국에 돌아와 아이를 낳은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귀국하는 공항에서 부모를 만날 수 있도록 모든 과정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김씨가 낳은 아기는 낙반연 회원에게 입양, 이 단체에서는 이를 ‘생명을 살린’성공한 사례로 꼽고 있다. 하지만 원치 않은 임신과 강간 등 부득이하게 임신을 할 수밖에 없었던 모든 여성들에게 이 사례를 적용시킬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답이 나온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은 “낙태금지법으로 인한 임신중절금지는 낙태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법화를 ‘촉진’할 것”이라고 말한다. 낙태를 결심한 임신부는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불법이라도 낙태를 할 가능성이 많으며 의사의 수술은 논외로 치더라도 불법으로 임신중절을 할 경우, 산모가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심각한 사태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한국보건사회원연구원이 지난 97년 실시한 조사에서는 임신 여성 4명 중 한 명이 낙태를 하고 이 중 약 80%는 불법시술을 받았다고 응답했다.

이미경 소장은 “낙태가 나쁘다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이 아니다”며 “낙태를 원하는 여성이 상담을 받는다는 조건하에서 법적으로 낙태를 허가받아야 산모에게 치명적인 불법적인 낙태를 줄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여성 대부분은 낙태수술을 하고도 3개월 동안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여건이 안됐다.

낙태 후유증을 호소할 만한 사람이나 기관을 찾을 수가 없었고 차라리 말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편했다고 토로했다”고 말했다.

한국사회의 특수성이 낙태를 부추기고 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서구의 낙태 찬반논쟁은 거칠게 말하면 ‘생명우선론’과 ‘선택우선론’에서 이뤄지고 있지만 이를 그대로 대입시키기에는 한국사회가 남녀평등 문제 등에서 너무 후진적이라는 것이다. 낙태 찬성론자들은 임신여성이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미혼모·미혼부에 대한 지원이 이뤄지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무조건 낙태를 금지하는 것은 오히려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구조적으로 낙태가 만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모든 책임을 여성에게만 지우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낙태수술을 한 여성활동가 정모씨는 “낙태찬반론은 개인 및 사회가 책임질 수 없는 출산과 여성을 고려하지 않는 낙태논쟁이 과연 옳은지에 대해 충분하게 고려한 후 이뤄져야 한다”며 “낙태 반대론자들의 가장 큰 허점은 이 사안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낙태를 하지 않았을 경우에 전혀 대비하지 않는 낙태금지법은 이 땅 수많은 여성들에게 악법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남성중심적 낙태관에서 벗어나 여성이 스스로의 몸에 결정권을 갖게 하는 법과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신아령 기자arshin@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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