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문화 코드로 자리잡은 ‘네이밍’의 정치학

지난 13일, 서울 신촌로터리 현대백화점 뒤쪽으로 그늘에 가린 작은 놀이터에서는 질기고 고귀한 생명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주관한 ‘놀이터에서 들려오는 생명의 작은 울림’이라는 행사다. 평화를 바라며 생명의 파괴를 퍼포먼스로 표현한 퍼포머들의 몸짓은 사람들을 전율시키기에 충분했다. 이후 지역문화와 환경, 차별 받는 소수를 위해 끊임없이 대중과 소통하려는 곳이면 어김없이 그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누구지? 기자는 한 장의 명함을 건네 받고 잠깐 멍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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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향미>

장난치자는 것도 아닌데 명함에는 ‘퍼포먼스 반지하 공공문화 프로그램 기획, 퍼포머, 화가 드라마고’라고만 적혀 있다. 오히려 “본명이 뭡니까”라고 묻는 기자에게 당황하는 기색이다. “본명을 얘기 안한 지 하도 오래돼서 쑥스럽네요. 고정환입니다.”

드라마고, 지경, 지현, 하루…

“드라마, 연극은 제가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공연하는 순간만은 저에게 예술적인 행위로, 거짓이 아닌 살아가는 그 자체로 존재하거든요.” 그의 이름에는 하고 싶은 일과 목적의식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미술을 전공한 그는 현실에 필요없는 예술지상주의를 거부하겠다는 중요한 표현을 한 셈이다.

“집과 학교에서 불리던 ‘고정환’이란 이름 석자는 서류에 남아서 스스로를 기록한 불편한 요소”며 “순수했지만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역사”라고 말한다. 그래서 1999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드라마고’라는 이름을 짓고 나서는 과거의 모든 역사를 부정하기 위해 비정하지만 가족과의 연락도 끊게 됐다고.

드라마고와 함께 퍼포먼스 집단 반지하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경’은 본명이다. 그렇지만 성을 쓰지 않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97년 공연을 시작할 때부터 썼던 것 같아요. 성(姓)을 물려받으면서 생일이며 성별, 정체성, 성적취향까지 주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모와 자식이 서로 독립하지 못하고 종속된 관계를 이룬 거죠.” 부모님 특히 아버지한테 종속되기 싫어서 어머니 성을 따르려고 했지만 성이라는 것 자체에 문제의식을 느낀 경우다. ‘정지경’에서 ‘지경’이 되기까지 많은 고민과 변화를 경험했었다고. “부모와 상관없는 독립체인데 오히려 아빠나 엄마 누군가의 성을 고집하면 더욱 종속적인 관계만 될 뿐이죠. 저는 성을 쓰지 않으면서 제 생활태도도 많이 바뀌었어요. 유행에 따라가지 않고 경제적으로도 독립했어야만 했으니까.”

영페미니스트의 별칭짓기

자신이 원하는 이름으로 바꾸는 것, 흔히 별칭 짓기는 96년 대학가에서 여성주의 활동을 하던 이들이 만든 들꽃모임을 통해 사회적 운동으로 확산됐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명명된 이름을 거부하고 진정한 자아 찾기에 나선 것이다. 지금도 여성주의 활동가의 별칭짓기 역사는 현재 여성해방연대 같은 여성운동단체나 영페미니스트 사이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후 99년 하자센터 역시 문을 열면서 이름짓기를 하나의 큰 사업으로 발전시켰다. 들꽃모임에서 불리던 ‘하루’를 이 곳 하자센터에서도 계속 쓰고 있는 정미희 교사는 별칭이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시켜 줬음을 강조한다.

“아이들이 제게 ‘하루, 밥 먹으러 가자’고 할 때는 선생님과 학생이라는 권력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에서 소통을 할 수가 있어요. 이름이 아닌 별칭을 부를 때 가장 동등한 관계가 되는 거죠.” 하자센터의 ‘스캥크’도 역시 “별칭을 쓰면서부터 사람들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고 상대방을 존중하게 됐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별칭 짓기는 ‘드라마고’나 ‘지경’처럼 문화예술계에서 종사하는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네이밍으로 발전됐다. 시간과 장소에 의해 본명 따로 별칭 따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존재를 규정하는 새로운 이름으로 정착된 것이다.

<보그걸> 등에서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사이다’. ‘김윤희’라는 예쁜 본명을 가지고 있지만 그가 찍은 사진은 ‘사이다’라는 이름으로 잡지 여러 곳에 실리고 있다.

“친구사이, 연인사이, 무슨 무슨 사이라고 할 때 쓰는 ‘사이다’가 제 이름이에요. 단순히 정지된 명사가 아니라 동작이나 연속성을 가진 말이죠.” 왜 이런 이름을 지었냐는 물음에 “그동안 너무 여성스러운 이름을 이름표에 달고 다녔는데 이름을 새로 지으면서 새로운 나를 만들고 싶었어요. 성격이나 외모도 마음에 들게 바꾸는데요 뭘” 하고 답했다. 함께 광고작업을 했던 ‘정신’ 또한 본래 이름은 ‘정경아’라고.

또한 네이밍은 성(姓)을 배제하기 때문에 성에 부여된 모든 사회적 가치를 거부한다.

페미니스트 가수 ‘지현’은 이름으로만 활동한 지 벌써 6년째다. “가족의 성에 의해 함부로 저를 규정 당하고 싶지 않았어요. 왜 성에 대해 가지는 고정관념 같은 거 있잖아요. 가족이기주의라는 것도 생기고 말예요.”

지난 달 <안티 아라키>전을 열었던 영페미니스트미술가연대의 ‘소윤’과 ‘태윤’도 같은 생각이다. 1, 2년 전부터 성을 쓰지 않은 소윤은 웬만한 리포트에는 제출자 이름에 ‘소윤’이라고 기입할 정도다. 여성주의의 별칭 쓰기에서 출발했지만 이들의 네이밍은 보다 급진적이며 또한 여성계에서 97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과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다. “여성계에서 호주제 폐지를 위해 부모 성을 함께 쓰지만 결국 성에 관해서는 어쩔 수 없이 집착하는 한계가 있어요. 저는 그냥 독립된 인격체인데 저 혼자로 평가 받아야죠.”

뿌리 찾기? 우린 뿌리 거부하기!

한마디로 말해 네이밍은 우리 사회를 읽을 수 있는 문화적 키워드다. 다양성의 가치를 기반으로 한 현대사회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기존의 한국사회에 이의를 나타내는 문화적 표현방식인 것이다.

이화여대 사회학과 함인희 교수는 젊은이들의 네이밍에서 한국사회만의 독특한 문화적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서양의 개인주의는 개인의 권리와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뿌리는 찾아가는데 반해 우리 사회는 집단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오히려 혈연을 암시하는 성에서 탈출하려는 건데요. 나를 찾아가는 과정은 같지만 결국 전혀 다른 문화적 양상으로 나타나죠.”

상당히 흥미로운 해석이지만 거기에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 개인과 집단의 갈등이 서로 충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을 쓰지 않고 이름이나 별칭을 쓴다는 건 위계나 서열, 혈통, 연령을 중시하는 지금의 우리 사회에 저항하는 한 방식”이며 “기존에 반하는 새로운 문화적 성격”이라는 것.

이제 네이밍을 소수 문화 게릴라들에 의한 단순한 재미거리라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 개인에게 있어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진지한 과정이며 서열과 혈통, 세대를 중시하는 집단과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저항, 나아가 수평적 인간관계를 맺으려는 시도다. 그렇기에 네이밍은 우리 여성들에게 존재하는 현대 사회의 억압적 존재가 무엇인지 다시 읽을 수 있는 문화현상이며 동시에 여성운동의 한 방식으로 분명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주 기자soon@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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