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집 건너 한 집서 가정폭력
사회적 비용 연 2조8000억
재피해 막고 자립 도우려면
피해자 경제적 안정이 필수
뉴질랜드·필리핀·미국 일부주 등
법제정 통해 유급휴가 부여
해고 위험 없이 이사하고
피해 회복할 수 있는 토대
6월 ILO 총회 검토안에 포함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이 27일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서 관계부처 합동 ‘가정폭력 방지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해 11월 26일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이 관계부처 합동 ‘가정폭력 방지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강화를 약속했지만 여기에 직장을 다니는 피해자를 위한 지원정책은 빠져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두 집 건너 한 집에서 발생하는 가정폭력은 ‘집안일’이 아닌 범죄다. 가해자 구속률이 1%도 안된다는 점, 피해자에게 신체적·정신적 피해를 주면서 해마다 2조원이 넘는 사회적 비용까지 초래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문제다. 가정폭력은 피해자의 노동환경에 영향을 미친다. 회사에 결근할 수 있고, 일에 집중하지 못해 생산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사를 하거나 연락처, 은행 계좌를 바꿔야 하는 일도 생기고, 수사나 소송 때문에 근무시간에 일을 봐야 하는 경우도 있다. 휴가를 쓰지 못해 스스로 일을 그만두거나 회사에 눈치가 보여 사표를 내는 피해자들이 생기는 이유다. 가정폭력은 일터의 문제라는 인식 아래 피해자의 고용 안정과 회복을 돕기 위해 노동 영역에서도 동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이미 해외에선 가정폭력 유급휴가를 법제화했다. 필리핀은 2004년 ‘여성과 그 자녀에 대한 폭력방지법’을 제정해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10일의 유급휴가를 부여한다. 피해자와 피해자를 돌보는 사람 모두 사용할 수 있다. 뉴질랜드는 지난해 7월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법’을 제정해 올해 4월부터 유급휴가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국도 뉴욕, 캘리포니아, 일리노이 등 일부 주에서 가정폭력 피해자 대상 유급휴가를 법제화했다.

가정폭력 문제가 사회 이슈가 되며 처벌법이 만들어진 지 21년이 지났지만 야만적 현실은 여전하다. 3년 마다 발표되는 정부의 전국 가정폭력 실태조사를 보면 가정폭력이 일어나는 비율은 45.5%(2013년 여성가족부)다. 그러나 주위에 도움을 요청한 경우는 1.8%에 그친다. 보복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피해자의 입을 막는다. 가해자 100명 중 1명이 구속되는 현실도 피해자의 침묵을 종용한다.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2015년부터 2018년 6월까지 가정폭력 검거 인원 총 16만4020명 중 구속은 단 1632명(0.995%)에 불과했다.

가정폭력은 한 가족의 삶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사회적 비용까지 초래한다. 여성가족부 위탁으로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09년 연구·발표한 ‘가정폭력의 사회적 비용추정’ 보고서를 보면, 가정폭력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사법체계, 의료비용, 사회서비스, 가사법률 등 직접비용만 2조821억원이다. 안케 회플러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원과 제임스 피어런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연구보고서를 통해 해마다 8조 달러(한화 9200조원)의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고 추산했다.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5.2%에 달하는 규모다. 전쟁과 테러로 인한 피해보다 25배 많다.

가해자에서 벗어나려 집을 탈출한 피해자들은 보호시설에서 피해를 회복하고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직장을 가진 피해자가 보호시설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쉼터 등 피해자를 위해 보호시설에 들어가려면 4대보험이 가입된 직장은 다닐 수 없어서다. 가해자가 위치추적할 가능성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휴대전화 사용도 제한적이다.

29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규탄 기자회견이 열려 참가자들이 국가 가정폭력 대응시스템 전면 쇄신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지난해 10월 29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규탄 기자회견이 열려 참가자들이 국가 가정폭력 대응시스템 전면 쇄신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서재인 한국여성의전화 가정폭력쉼터 센터장은 지난 4월 26일 국제공공노련 한국가맹조직협의회 주최로 열린 '가정폭력 유급휴가' 제도 토론회에서 “직장을 다니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을 위한 지원 정책은 전무하다”며 “경제적 안정성 상실은 피해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가정폭력 피해를 고려해 직장 내 불이익과 해고 염려 없이 안전휴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제도 신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가정폭력 유급휴가는 가정폭력 피해자가 고용 안정을 보장하는 동시에 일터가 젠더 기반 폭력을 막는 중요한 개입 지점으로 작동하게 한다.

허미숙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은 ‘가정폭력 피해자 고용안정을 위한 개선과제’ 보고서를 내고 “가정폭력 피해 여파로 인해 직장을 잃게 된 피해자를 사후에 지원하는 것보다는 피해자의 고용안정을 보장해주는 것이 장기적 관점에서 가정폭력 피해자를 위한 자립정책이자 폭력피해 재발을 막는 예방정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노동조합도 유급휴가 도입에 적극적이다. 공공기관에 종사하는 노동자 2000만명이 소속된 국제공공노련(PSI)은 노조 차원에서 가정폭력 유급휴가 도입을 촉구하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장영배 PSI 한국가맹조직협의회 집행위원장은 유급휴가를 도입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피해자가 긴급한 상황을 처리하고 관리하는데 비용이 들어가고 폭력적 관계를 벗어나기 위해선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급으로 휴가가 있다고 해도 피해자가 휴가를 낼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지적했다. 장 위원장은 “일터에서 시행하는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 정책은 피해자를 위한 실제적 지원이자 젠더 기반 폭력을 끝내는 전략이기도 하다”며 “가정폭력 유급휴가 정책은 폭력이 용인될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폭력의 사이클을 끝내는데 유급휴가 정책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견이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의 고용안정을 위해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이어지고 있다. 허 조사관은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4조의5에 가정폭력 피해자 유/무급 안전휴가 및 직장 내 보호조치 제도의 신설을 명시하는 방안, 또는 성폭력, 가정폭력, 데이트 폭력, 스토킹 등과 같은 범죄 피해 근로자가 동일한 수준의 법적 보호 및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근로기준법’에 피해 근로자의 고용안정을 보장해주고 직장 내 보호조치를 강화하는 규정을 신설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오는 6월 제네바에서 열리는 국제노동기구(ILO) 100주년 총회에서는 가정폭력 유급휴가 정책이 포함된 협약과 권고 검토안이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노동세계의 폭력과 괴롭힘 제거에 관한 협약’ 검토안에 회원국이 가정폭력이 노동세계에 미치는 영향의 인식과 그 영향을 다루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실행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권고 검토안에는 세부 내용으로 가정폭력 유급휴가 등이 명기됐다. 이번 총회에서 협약이 비준되면 국내에서도 가정폭력 유급휴가 정책 법제화를 위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될 전망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