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여성들의 역량 반영
건국강령에서 여성참정권 인정
1948년 제헌헌법으로 이어져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과
1948년 제헌헌법으로 이어저

1911년 4월 11일 선포한 대한민국 임시헌장
1911년 4월 11일 선포한 대한민국 임시헌장 / 국사편찬위원회

근대화가 본격화된 1900년대 초, 여성의 참정권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주요국가에서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권리로 떠올랐다. 사회구성원의 정치참여권은 대표적인 기본권이지만 당시 여성의 정치 참여는 여성을 제외한 남성에게만 투표권이 부여됐다. 이를 획득하는 것은 여성운동의 중심 이슈가 됐다.

참정권을 쟁취하기 위한 세계 여성들의 열망은 다르지 않았지만 한국의 양상은 달랐다. 우리나라는 3·1운동 후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헌법인 ‘임시헌장’에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정치체제로 민주공화제를 채택하고 국민이 주인임을 선언했다. 제3조에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 일체 평등임’을 천명했다.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유한 자는 선거권 및 피선거권이 유함’을 통해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1919년 4월 25일에 공포한 ‘대한민국임시의정원법’에는 중등교육을 받은 만23세 이상의 남녀 모두에게 피선거권을 부여했는데, 이는 당시 보통선거권조차 제도화된 국가는 많지 않았다.

세계에서 처음 여성의 투표권을 보장한 나라는 1893년 뉴질랜드다. 영국은 1918년 여성들의 오랜 여성참정권 투쟁 끝에 나이 제한을 둔 참정권을 쟁취했다. 미국은 각지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이 진행되다가 1920년 연방정부가 모든 주에서의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다. 프랑스는 시민혁명 당시인 1793년 올랭프 드 구즈는 단두대에서 처형됐지만 바뀐 건 없었다. 영국과 미국의 여성운동의 영향을 받아 1946년에야 법으로 보장됐다.

서구와 한국의 이같은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한국의 여성들이 항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결과로 보는 이들이 많다. 1898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선언문인 ‘여권통문’을 발표하면서 여성의 정치참여권을 최초로 촉구한 이후 한일합병까지 체결되면서 여성들은 항일 독립운동과 함께 여성운동을 함께 전개했기 때문이다.

김형목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은 “미국이나 영국 등 소위 선진국도 여성참정권을 얻지 못했을 당시로써는 매우 진보적인 결정인데 이는 여성운동가들의 활약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의 여성운동은 서구에서도 영향을 받았지만 독립운동과 상호작용하면서 여성 권리와 인식에 일찍이 눈을 떴다는 주장도 있다. 독립운동은 민족의 독립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 주체의식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또 동시에 가부장적 사회와 성차별을 비롯해 각종 차별과도 동시에 싸우면서 여성의 권리와 의무를 강조했다.

윤정란 서강대학교 종교연구소 연구원은 “여권통문에는 여성도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선언이었으나, 20년 후 임시헌장에는 우리 여성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 마땅하게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변화를 보여준다”고 의미를 짚었다. “남성지배적, 가부장적 질서가 공고한 일본제국주의와도 싸운 것”이라는 것이다.

임시정부의 이같은 정신은 1941년 11월 28일 새 국가 건설을 위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으로 이어져 여성의 참정권을 공식 인정하기도 했다.

이같은 흐름은 이후 1948년 7월 17일 공포된 대한민국 제헌헌법에 담겼다. 제8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 앞에 평등이며 성별,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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