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속으로] 국립창극단의 공상과학 창극 '우주소리'

흰 우주복을 입은 주인공 소녀. 소녀의 뇌 속에 기생한다는 외계의 생물체. 무대 위에 걸린 우주선. 그 옆에 보이는 행성 모습의 원형체들.

국립창극단의 공상과학 창극 '우주소리'의 한 장면. 사진_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의 공상과학 창극 '우주소리'의 한 장면. 사진_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이 최근 제작해 선보인 '우주소리' (연출 김태형)의 이미지다. 등장인물과 무대로 봐서는 공상과학을 소재로 한 작품임이 틀림없다.

"창극에 웬 우주 이야기…?"

익살스럽게도 이 작품은 첫 부분에서 소리꾼의 대사를 통해 이런 선입견을 일시에 무너뜨린다.

"어차피 수궁가도 토끼랑 거북이랑 용궁에 가고, 홍보전도 박을 켰더니 금은보화가 나오고, 멀고 먼 은하계나 뭐가 다르단가!"

'우주소리'는 국립창극단의 실험적인 <신창극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젊은이들에게는 흔히 '고리타분한것으로 인식되는 창극을 신선한 해석과 현대적 감각으로 새롭게 만들어보자는 취지를 가진 기획물이다. 첫 번째는 소리꾼이며 연출가인 이자람이 프랑스의 구전동화 '빨간 망토'를 모노드라마 창극으로 꾸민 '소녀가(올해 3, 자유소극장) 였다. 호기심 많은 소녀가 숲에 들어갔다가 위기를 맞게 되나 용기와 기지를 발휘해 슬기롭게 빠져나오는 이야기. '우주소리'는 전혀 다른 배경의 창극임에도 역시 호기심 많은 소녀의 모험담을 그렸다는 점이 흥미롭다.

국립창극단의 공상과학 창극 '우주소리'의 한 장면. 사진_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의 공상과학 창극 '우주소리'의 한 장면. 사진_국립극장 제공

주인공은 이제 막 16번째 생일을 맞은 코아티. 1인용 우주선을 생일선물로 받은 코아티는 호기심에 들떠 아버지의 당부를 어기고 한계비행 구역 밖으로 우주여행을 떠난다. 거기서 예기치 못했던 일이 일어난다. 외계의 지적인 생명체 실료빈이 코아티의 뇌 속으로 들어와 기생하게 된 것. 본성이 착한 실료빈이 숙주인 코아티에게 뇌 안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준 데 대해 감사하고, 코아티가 외계의 생명체를 난생처음으로 만나 기뻐하며 서로 우정을 나누는 것도 잠시. 실료빈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코아티에게 치명적인 존재가 되며, 어찌할 수 없는 그 상황을 괴로워한다. 코아티 역시 그 마음을 헤아리며 함께 아파한다. 게다가 이들을 접촉한 다른 우주의 생명체도 모두 파괴되고 말 위기에 처한다. 둘은 전염이 급속히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태양의 화염 속으로 함께 돌진해 몸을 불사르고 지구를 구한다.

이 작품의 원제는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The Only Neat Thing to Do)'. 코아티와 실료빈이 한마음이 되어 자신들을 희생해 지구를 구한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눈여겨볼 대목 하나는 모험을 즐기고, 당당하게 대의(大義)를 실천하는 주인공이 소녀인 데다 그녀의 뇌 속에 기생하다 결국 비장한 결정을 내리는 외계 생명체 역시 또래의 소녀로 묘사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여성이 주체적인 결단력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도 있다는 점을 넌지시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국립창극단의 공상과학 창극 '우주소리'의 한 장면. 사진_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의 공상과학 창극 '우주소리'의 한 장면. 사진_국립극장 제공

이 작품의 원작소설 작가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분명히 남자 이름이지만 사실은 여성인 앨리스 브래들리 셸든(1915~1987)의 필명이다. 그는 필명을 쓴 이래 팬들은 물론 동료 문인들과의 대면접촉은 철저히 피하면서 서한으로만 교류해 주변에서는 그를 의심의 여지 없이 남자로 인식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그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제임스가 페미니스트 남성이라는 전제 아래 그의 작품을 분석했던 비평가들이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고 한다.

'우주소리'는 국립창극단의 젊은 소리꾼들이 대거 참여해 만든 창극이지만 뮤지컬 요소가 많이 가미된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헤비메탈사운드 같은 전기기타와 드럼 연주가 무대와 객석을 채우며 유태평양을 비롯한 네 명 소리꾼들의 신명을 북돋는다. 우정과 고통을 서로 나누는 코아티 (조유아 분)와 실료빈 (장서윤 분)의 2중창 등 여러 장면에서 소리가 아닌 뮤지컬 느낌의 노래가 흐른다. 등장인물들이 소리를 하느냐, 노래를 하느냐에 따라 국악기와 서양악기가 번갈아 사용된다. 판소리의 원형 유지를 중시하는 순수파 관객에게는 볼썽사나울 수도 있겠으나 창극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계층이 부담 없이 공연을 즐기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뮤지컬 형식의 노래가 나오는데도 객석에서 '얼쑤!' 하며 저절로 추임새가 나오는 걸 볼 때 이 작품이 장르융합에도 불구하고 창극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듯했다.

공연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10월21~28일. 내년 초에는 신진 박지혜 연출의 창극이 새롭게 선보인다.

강일중. 공연 컬럼니스트

언론인으로 연합뉴스 뉴욕특파원을 지냈으며 연극·무용·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의 기록가로 활동하고 있다. ringcy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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