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니와 준하

영화 <와니와 준하>를 보는 느낌은 이러했다. 애니메이션과 순정만화, 그리고 하이틴 로맨스의 균형 잡힌 이쁜 설레임들. 손바닥만한 크기로 접히는 장바구니처럼 차곡차곡 접어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지치고 추레해지면 슬쩍 꺼내 펴 보고 싶어지는 사탕처럼 달디단 움직이는 그림 이야기. 와니가 준하와 함께 사는 모양새는 너무나 살폿하고 조용해서 골칫거리 ‘동거’의 안과 밖 사정이 별로 끼어들 여지가 없다. 와니가 (이복) 동생 영민을 마음속에 키워나가는 과정 또한 여리고 결 고운 감성의 아우라에 잘 싸여 있어 인간에게 지워져 있는 가장 원초적인 금기가 위반되고 있다는 처벌의 두려움이 깃들 틈새가 없다. 암청빛 두려움과 깊은 슬픔도 고운 체에 걸러지고 악의 없는 가을 햇살에 잘 마른다면 이런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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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니와 준하>는 현실과 애니메이션적 상상력 사이의 완충지대에 사려 깊게 근친상간적 욕망과 ‘함께 살아보기’의 실험, 그리고 동성애를 그려 넣는다. 사회 규범이 호시탐탐 엑스 표를 치며 감시, 관리하려 드는 관계유형들이 편견이나 미움, 불필요한 갈등의 무게를 벗고 조심스레 잠자리 날개짓을 펼친다. 이런 순정만화적 가벼움과 투명성은 터무니없는 의미로 장전된 전통과 법도의 무거운 장총을 메고 여전히 ‘올바른’ 관계란 무엇인가를 가르치려 드는 파수꾼들 옆을 살짝 지나쳐 다른 풀밭에 텐트를 치는 재치이다. 아저씨, 그 찡그린 얼굴근육은 뭔가요, 아, 싫다, 싫어, 난 다른 곳에서 내 이야기를 만들거야.

동시에 이런 가볍고 경쾌한 태도는 그러나 이미 편견과 오해의 진흙탕에 정강이까지 푹푹 빠지며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야속한 농담이 될 수도 있다. 혹은? 동거든, 동성애든, 근친상간이든 다 취향의 문제가 되어 버렸단 말인가? 몽롱한 가수면 상태인양 귓전을 울리는 작은 유혹의 음반소리, 손짓하는 햇살, 너의 얼굴을 나의 얼굴에 포개놓는 창 - 명료하고 투명한 <와니와 준하>의 밑그림은 그러나 이렇듯 꽤나 복잡하게, 불투명하게 얽혀있기도 한 것을.

그러나 밖으로 나가는 문에는 열쇠가 잠겨 있지 않다. <와니와 준하>가 요즘 문화 텍스트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근친상간적 모티프들의 상호모방을 떠나 야무지게 심호흡을 가다듬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와니와 준하>가 마련한 완충지대는 바로 와니가 통과해 나가는 통과제의의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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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니는 그 곳에 멈추어 서 있지 않는다, 과거의 정거장들을 하나 하나 통과해 현재의 공간을 구축해 나간다. 자신의 분신이며 육체의 일부이기도 한 동생 영민을 사랑하던 소양과 그녀가 나란히 기차역에 서서 기차를 기다릴 때, 나란히 차렷 자세로 사진을 찍을 때, 그 ‘순간의 멈춤’인 사진 속으로 과거의 기차가 도착하고 내일로 가는 기차가 떠날 준비를 마친다. 그렇게 사랑은 서로 손을 떼며, 서로 손을 건네며 ‘간이역’의 이야기를 쓴다.

그러나 <와니와 준하>는 와니와 준하, 여자와 남자에게 공평한 시점을 주려고 꽤나,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쓴 영화다. 영화 자체가 와니의 과정으로서의 통과제의를 와니의 시점에서 펼치고 있는 반면, 영화를 열고 닫는 애니메이션은 준하의 시점에서 준하의 ‘정적으로 응고된’ 첫사랑 환타지를 성공적으로 완성(?)시켜 준다. 다양한 형식과 다양한 ‘문제적 이슈’들의 균형감 있는 집짓기가 남성 판타지에 대한 고려까지 요청했던 것일까.

<김영옥/ 이화여대 여성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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