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양순 우리원 대표

박성인 경북봉화유기농가 대표

 

 

전양순 우리원 대표 ⓒ최형미
전양순 우리원 대표 ⓒ최형미

사람들은 유기농이 건강한 식품이며 지역의 토양과 기후에 맞는 토종 씨앗으로 유기농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서민들은 유기농보다는 더 싼 농산물을 찾는다. ‘왜 좋은 소비를 하지 않느냐’고 그들을 질책해야 할까? 집세, 교육비, 각종 신용카드 값을 물고 나면 졸아버린 가슴만큼 천원, 이천원 차이에도 주머니를 움켜쥐는 것이 서민들의 삶이다. 생존을 위한 서민들의 선택만을 탓할 수 있을까?

제8차 가배울토종씨앗포럼은 유기농사를 짓고 직접 유통을 하는 우리원 전양순 대표와 경북봉화유기농가 박성인 대표를 강사로 초대했다. 두 농부는 아주 다른 사례를 보여줬다. 전 대표는 유기농을 하면서도 어떻게 농부가 잘 살 수 있는가를 보여줬고, 박 대표는 농민 다수가 겪는 유기농업의 어려움과 농업정책 전환을 통해 유기농 활성화를 제안했다.

전 대표는 2009년 사건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남편이 산으로 100일 단식기도에 들어가고 86일 되던 때 막내 아이와 함께 기도처에 찾아갔었어요. 그는 늘 하던 대로 단상 앞에 앉아 기도하고 있었지요. 그를 기다리던 우리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는 영원히 우리를 떠나버렸지요.” 전 대표의 남편은 유기농 개척에 평생을 바친 정농회(바른 농사를 짓는 모임) 회장 강대인씨다. 그가 남기고 간 기도노트에는 전국학교급식을 유기농으로 해야 한다는 내용이 꼼꼼하게 적혀있었다.

전 대표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남편은 새벽 4시에 일어나 한 시간 동안 기도를 했어요. 그리고 밤 10시에서 11시까지 마당 항아리들 사이에 서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도를 했지요. 새벽 5시면 물을 보러 논에 나가서 벼를 보고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했어요.” 유기농을 지으면 3대가 굶어 죽을 각오, 자식을 무식쟁이로 만들 각오, 미치광이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라고 했다는데, 그의 경지는 이미 이 세상의 것을 뛰어넘어 있었다.

“남편은 어딘가 갔다 올 때마다 한 줌 씨앗을 챙겨왔어요. 그리고 육종을 했지요. 육종 과정은 손이 많이 가는 것이라 농사짓는 것보다 사람들을 더 많이 써야 했어요. 농진청이나 연구소에서 해야할 것을 굳이 왜 하느냐고 물었더니 남편은 농부가 자기 땅의 토양과 기후에 맞는 씨앗을 직접 채종해야 병이 없는 건강한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지금 우리원에서 판매되는 녹색미, 오색미 등은 모두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거에요.” 남편을 떠나보낸 후 이제 전 대표가 새벽이면 논에 가서 물을 보고 식물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혹시 빠르게 추수하면 벼가 스트레스 받지 않을까 염려하고, 좋은 토양을 주려고 애쓰고 있다. “깨끗한 황토에 왕겨숯과 맥반석을 섞어 토양을 만들어 주면 하우스에 곰팡이도 안 생기고 연장 질병도 없어요.” 그는 확신에 차 있었다. 우리원에는 1년에 5000여명이 찾아 체험과 교육을 받는다. 그들은 곧 직거래 고객이 되기도 한다. 전 대표의 강의를 들으니 행복했다. 그로부터 뭔가 흔들리지 않는 평화가 전해졌다. 전 대표와 오랫동안 함께한 기업이 풀무원이다. 뜻을 함께 나눈 기업이 판로를 열어주고 신뢰를 쌓으니 토종씨앗 육종, 유기농업이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박성인 경북봉화유기농가 대표 ⓒ최형미
박성인 경북봉화유기농가 대표 ⓒ최형미

단정한 외모에 청바지를 차려입은 박 대표는 30대 중반에 고향으로 돌아와 유기농사를 하며 좌충우돌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봉화 지역 골짜기에서 다양한 유기농사를 짓고 토종닭, 염소를 기르며 개 한 마리를 벗 삼아 살아가며 ‘즐기는 꾼’, 농사꾼이다.

박 대표는 농부로 살기 전 20~30대를 도시에서 공부하고 유통업을 하며 성공과 실패를 했다. 돌아온 그는 7년 간의 농사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 개별 단위 지역 화폐를 시도했으며, 1400평에 미니호박 농사를 지어 판매도 했다. 농사가 잘됐을 때 한 달 200만원 수입을 올렸지만, 오히려 손해를 볼 때가 더 많았다고 했다. 율무, 귀리와 같은 잡곡을 도정할 방앗간 찾기가 어렵고, 찾았다고 해도 문을 닫고 해주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정부 관계자들은 수입업자나 종묘상들 말만 듣고 아로니아, 블루베리 등 새로운 특수작물을 심으라고 권하지만, 판로가 없어 결국 밭을 갈아엎는 일은 흔한 일이지요. 농사는 몸으로 때우고 지인 등쳐먹기는 일이 되기 일쑤이지요.”

박 대표는 힘겨운 농촌의 상황을 전했다. “판로가 막힌 농민들에게 정부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줍니다. 친환경 택배비, 유기농 직불금, 거친 땅에서 농사를 지어도 보조금을 주고 있어요” 그러나 이러한 정부 보조금은 땅이 있어야 하고 생산한 것을 증명해야 하고 친환경을 증명해야 하는데 서류 준비는 일부 농부들이나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그는 정부가 좀 더 새로운 정책에 눈을 떠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가 사는 봉화군에는 97가구가 사는데 평균 나이가 67세에요. 노인이 다수인 곳에 체험관을 지어라, 기름공장을 만들고 고추 빻는 시설을 하라고 하지만 결국 아무도 이용하지 않고 있어요. 그는 일본 다케다 시의 토마토학교의 예를 들면서 도시 청년을 농촌에 정착시키는 정책을 소개했다. 유통업 경험이 있는 박 대표는 농산물 유통의 문제가 농산물뿐 아니라 소비자 문제라는 점을 지적했다. “정부는 농부에게 싸게 농산물을 내놓으면 보조금을 준다고만 말하지요. 그러나 왜 소비자에게 투자해 판로를 개척할 생각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여성농민 복지 바우처처럼 도시 사람들에게 토종농산물을 바우처를 주거나 도시와 농촌 연계를 활성화한다면 판로가 생기잖아요? 소비자 교육을 통해 농업이 공공자산이라는 의식을 높여야 하지 않을까요? 시장이 열리면 농민은 유기농사를 열심히 지을 수 있어요.” 국화가 활짝 핀 시골집을 보여주며 언제든 애들과 친구들을 데리고 놀러 오라고 전한다. 섬 같은 곳에서 나뭇가지로 울타리 삼아 살고 있지만 탁배기 한사발 함께 나누는 즐거운 농부의 삶을 나누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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