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받은 여성들 마음까지 치료해 주고 싶다”

@10-3.jpg

한국의 여성 슈바이처 유루시아 수녀(72. 본명 유우금)의사가 한평생 아프리카 오지 등을 돌며 사랑의 인술을 펼친 공로로 제1회 자랑스러운 경남여고인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수녀복을 입지 않은 평복차림이지만 오히려 범인(凡人)을 뛰어넘는 소탈한 모습의 유루시아 수녀는 케냐 원주민의 가슴을 보듬던 한국의 슈바이처를 충분히 가늠케 한다.

소설가를 꿈꾸던 소녀시절 그는 부산 일신병원의 닥터 헬렌 매켄지를 만나면서 인생의 나침반을 잡았다.

“인큐베이터가 없어 나무상자에 백열전구를 넣어 따뜻한 온도를 유지해야만 살아날 수 있는 조산아를 밤새 뜬눈으로 간호하고 남편도 수혈하기를 거부하는 산모에게 자신의 피를 나눠주기에 주저없었던 호주 선교사 매켄지를 지켜보며 ‘매선생님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지요.”

부산 메리놀병원에 근무하다 1968년 아프리카 케냐로 떠나면서 그의 청진기는 병마에 신음하는 오지인들을 내리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이 되었다. 케냐 본국 의사들도 근무여건이 좋은 나이로비시에만 머물기를 원하는 상황에서 유수녀가 키난고 병원 원장으로 의료 선교를 하던 곳은 말라리아와 작열하는 태양과 싸워야 하는 거칠기 그지 없는 곳이었다.

케냐말을 배워가며 마을 여인들을 교육하기도 했으며 사막속에서 하루 300명이 넘는 환자들을 진료하고 잦은 수술과 격무로 몸은 지치기 일쑤였다.

“일부다처제에 자식이 몇명인지도 모르는 남편과 아버지, 당시 그곳에선 여성의 인권이 있을리가 없었다”고 전하는 유수녀는 20여년의 세월을 그들과 함께 보내면서 청년에서 초로의 길에 접어 들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한창일 때 고국을 찾은 그를 기다리는 곳은 역시나 소외받은 이들이었다. 서울 요셉병원 등지에서 에이즈환자, 행려자, 매매춘 여성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아프리카를 떠나던 날 원주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마마웨뚜! 가지 마셔요”, “우리들의 어머니! 가지마셔요”라고 외친 말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유수녀는 보름 남짓의 짧은 고국 나들이도 잠시, 중국 길림 전력공과대학의 영어교수 직분을 소홀히 할 수 없다며 만개한 고향의 봄꽃을 뒤로 한 채 중국으로 떠났다.

<동두천 유승숙 통신원>

what is the generic for bystolic bystolic coupon 2013
cialis coupon free discount prescription coupons cialis trial coupon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