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화두는 변화없이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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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민원기 기자>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운동합니다”라고 말하는 부천여성의 전화 김은혜 회장.

그가 반평생을 살아온 인생 이야기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우리 시대의 ‘파란만장’했던 역사의 현장에 언제나 두 발 딛고 서 있었던 그에게 언제나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었다. 가족에서부터 지역주민까지.

1970년에 대학교 새내기였던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첫번째 전환점이 되는 사건을 접하게 된다. 한 청계천 노동자의 분신사건이 그것이다.

“전태일 분신사건은 제게 정말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그동안 제가 살아온 삶 전반을 돌아보게 되었죠.”

비록 대학 1학년이었지만 김회장은 사회사업학과라는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학과에 소신지원해 들어갔다. 그리고는 나름대로 투철한 사회문제의식을 갖고 열심히 살아간다고 자부했던 그가 전태일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삶에 메스를 가하게 된다. 그리고 드러나는 자신에 대한 한없는 부끄러움과 죄의식.

“자기보다 어린 노동자들을 위해서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나눈 전태일이란 사람이 살아온 삶에 대해 알게 되면서 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전태일 분신사건으로 노동자 삶에 눈돌려

이후 그는 노동자들의 삶에 더욱더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교내 사회과학학술모임인 ‘새얼’에의 참여는 그의 사회문제의식에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가 된다. 특히 새얼의 지도교수였던 이효재씨와의 인연은 “이효재 선생님은 제 삶의 거울이세요”라고 할만큼 그에게 큰 행운이었다.

“이효재 선생님 뿐 아니라 새얼에서 알게 된 많은 선후배들은 지금도 제게 커다란 재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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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해 5월 경찰과 함께 ‘가정폭력 없는 평화의 달’ 캠페인에 나선 김은혜 회장.

새얼 활동을 통해 김회장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밑거름을 뿌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 밑거름을 바탕으로 그는 학교를 졸업하기 이전부터 학교 실습 수업으로 나간 인천산업선교회를 시작으로 노동자들과 삶을 함께 한다. 그리고 이 때 만난 조화순 목사의 삶은 그에게 또 하나의 커다란 교훈이 된다.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삶 속에서 아픔을 나누는 목사님의 삶을 보며 저 또한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삶 속에서 그들의 아픔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기 전인 73년 말 이대생들 절반 이상이 참여한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그는 수배의 몸이 된다. 그리고 바로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면서 그의 수배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런 수배생활 중에도 그는 해오던 활동들을 계속한다. 그리고 13개월만에 가족과 만난 기쁨도 잠시, 김회장은 바로 1년여의 요양원 생활을 하게 된다. 수배생활로 오른쪽 폐가 나빠질 대로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감기한 번 제대로 걸린 적이 없는 저였는데 저를 비롯한 가족들뿐 아니라 절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말 큰 충격이었죠.”

하지만 그는 요양원에서의 생활을 ‘성숙의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내가 직접 아파보니까 비로소 아픈 사람들의 처지가 절실하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러면서 내가 그동안 몰랐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심정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법을 배우게 됐죠.”

그는 무엇보다 바로 곁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굳은 다짐을 머리 아닌 몸으로 하게 되었다.

산업재해 관심이 ‘구로의원’ 설립으로

이후 병원에서 퇴원하고 노동자들의 삶으로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간 김회장은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목격하며 노동자들의 건강에 특별한 애정을 쏟아 붓는다. 그러면서 자연히 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이나 근로조건 등으로 인한 산업재해 문제에 다가가게 된다. 급기야 그는 의료계를 비롯해 뜻이 맞는 각계 사람들과 힘을 합쳐 노동자들의 건강문제를 전문적으로 관리하게 될 ‘구로의원’을 설립한다. 그리고 2년 뒤‘노동과 건강 연구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산업재해와 관련해 전문적 활동을 벌여 여론화시키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노동운동을 하던 김회장은 88년 ‘원진레이온 직업병’사건에 접하면서 지금에 이른 지역여성운동으로 방법적인 선회를 하게 된다.

“지역 노동자들의 절박한 현실을 보며 운동가가 지역 생활에서 밑에서부터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김회장은 ‘풀뿌리 운동’에 열의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 때까지 부천에 살면서도 저의 운동의 터전은 서울이었어요. 한마디로 부천 생활은 하숙 생활이었던거죠. 하지만 원진사건 이후 제가 사는 지역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를 지금까지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전환기였다고 말하는 김회장. 그는 그 때나 지금이나 서울·중앙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운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밑에서부터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한 풀뿌리 운동을 다시 한 번 제안한다.

지역으로 내려간 김회장에게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화두는 ‘인권’이었다.

“어떤 운동이건 결국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세우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이런 그에게 풀뿌리 운동이라는 새로운 화두와 지금까지 그가 운동을 해 오면서 언제나 놓지 않고 있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더해지면서 김회장은 자연스럽게 지역여성운동판에 뛰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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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일 경기여성단체연합 호주제폐지운동본부 발대식을 겸한 캠페인에서(앞줄 왼쪽 네번째가 김은혜 회장).

삶 속에서 풀어내는 풀뿌리운동

“결국 풀뿌리 운동이라는 건 내 삶에서부터 운동을 시작하자는 것인데, 여성 그것도 기혼여성이라는 나의 생활이 운동의 출발점이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하숙생활이었던 부천 생활이 이제는 어느새 지역 주민들의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함께 하는 ‘사랑방 생활’이 되었다는 김회장.

그는 부천지역에 여성인권을 대변해 줄 단체가 없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한 지역여성들과 함께 부천여성의전화를 만들어 올 초 창립총회를 가졌다.

부천여성의전화에서는 ‘생활 속에서 풀어보는 여성인권 이야기’교육을 진행중이다. 특히 이번 교육은 그간의 지역여성교육들이 여성들의 삶 속으로 다가간 교육이 아닌 불러모으는 교육이었다는 문제의식하에 ‘주민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주민과 함께 하기’를 실천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교육이라고 한다.

“어떤 분이 그러시더라구요. 어렵게 얻어낸 여성문제에 대한 법적인 성과가 여성 일상으로 파고들어 가려면 아직도 멀었다구요. 우리의 교육이 그런 괴리감을 극복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래요.”

김은혜 회장은 말 그대로 ‘삶의 여성학’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다. ‘내 삶이 곧 운동’이라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결코 실천하기 쉽지 않은 그 명제가 김회장에게는 ‘참’인 명제였다.

한박 정미 기자 woodfish@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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