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어차피 결혼하잖아. 경력과 업적은 물거품이 되겠지. 그래서 난 여자들한테 투자 안 한다.” 예술학도 A씨가 10대 때부터 들은 말이다. 학원에서도 학교에서도 지도 교사들은 성차별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예술적 잠재성을 판단하는 잣대는 ‘성별’을 기준으로 성립했다. 소수의 남학생이 더 실력 있는 여학생들을 제치고 좋은 기회를 얻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A씨는 자연히 “페미니스트가 됐다”. 

여성이라서 원하는 일을 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30대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김 씨의 꿈은 소년만화가다. 만화 전공 후 기성 작가의 견습생에 지원했으나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어시스턴트가 되면 다른 견습생들과 작업실에서 함께 숙식하는데, ‘여자가 있으면 옷도 못 벗고 다녀야 한다’더라고요.” 어렵게 기회를 얻는다 해도 모두가 평등한 대우를 받는 건 아니다. 최근 서울시 조사에 따르면 한국 여성 만화·웹툰 어시스턴트의 월평균 수입은 고작 69만원이다. 남성은 141만원이었다. 

여성이라서 더 불합리한 직장 내 대우를 받는 이들이 있다. 방송작가 황민주 씨는 미처 메이크업을 못 받은 출연자를 위해 분장팀 대신 허둥지둥 분칠을 해줬다가 PD에게 혼이 났다. “여자가 돼서 화장 하나 제대로 못 해줘? 너 여자 맞아?” 방송작가 10명 중 9명이 여성이다. 업계에선 ‘남자한테 허드렛일을 시키기 어려워서’ 남성 신입 채용을 꺼리는 분위기라고 한다.

지난 18일 대학로에서 열린 ‘2017 청년포럼, 문화·예술이 젠더를 묻다’에 모인 이들은 여성이 한국 문화예술계에서 일한다는 게 어떤지를 들려줬다. 작곡가 한모 씨는 “여자가 음악의 이치를 잘 알 것 같냐?” 따위의 말을 들으며 음악을 공부했다. “음악 하는 여자는 징그”럽다거나, 여성이 만든 음악에서는 “자궁 냄새”가 난다는 남성 뮤지션도 있다. 자유, 평등, 해방을 지향한다는 문화예술인들의 세계에서도 여성의 자리는 낮고 좁다. 주최 측은 ‘말 못 한 이야기를 속 시원히 털어놓으라’는 의미에서 사이다를 넉넉히 준비했지만, 가슴 턱 막히는 ‘고구마’ 사연들의 뒷맛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SNS를 중심으로 한 문화예술계 내 성차별·성폭력 고발 운동이 한국 사회를 뒤흔든 게 불과 수개월 전이다. 보복과 퇴출 위협을 무릅쓰고 목소리를 낸 이들은 아직 응답을 받지 못한 듯하다. 제재와 처벌을 받아야 할 이들은 남성 카르텔의 비호 하에 살아남았다. 여성을 성적대상화하는 책을 쓴 탁현민 문화콘텐츠기획자도 청와대에서 별일 없이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차별과 혐오를 휘두른 남성들이 권력을 쥘 때, 여성은 소수자이자 주변인으로 남았다”는 여성들의 한탄엔 이유가 있다. 

성평등을 표방하는 정부라면 이들의 한숨에 귀 기울여야 한다. 정부의 굳은 의지는 변화를 앞당길 수 있다. 성평등 모범국가 스웨덴에서도 2000~2012년까지는 남성 감독의 영화가 전체의 70~90%였다. 정부 주도로 설립된 스웨덴영화진흥원(Swedish Film Institute)은 2011년부터 매년 제작지원의 절반을 여성 감독 영화에 할애하는 과감한 변화를 꾀했다. 효과는? 2014년 스웨덴 영화제 수상 감독 10명 중 7명이 여성이었다. 2015년엔 여성 감독 비율이 44%로 상승했다. 여성이라서 안 되는 게 아니라, 여성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게 문제였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균형을 맞추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하고 실질적인 노력을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성평등 정부’라는 선언은 헛구호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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