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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전단계 아닌 주체적 ‘선택’

“사회적 편견·불이익도 감수하겠다”

가부장제적 가족개념 바꾸는 신호탄

최근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동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혈연중심적 가족제도에 반기를 드는 일부 젊은 세대들이 동거를 대안적 가족형태로 인식하는 추세가 확산되는 가운데 인터넷상에서도 동거사이트, 각종 포털사이트의 동거 동호회가 인기를 끌고 있다.

동거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동거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동거를 선택하는 동기 등 동거양상도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동거를 대부분 경제적인 이유 등 결혼의 전단계로서 불가피하게 택했다면, 최근의 동거는 결혼여부와 무관하게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하나의 가족형태로 바뀌고 있다.

이와 함께 동거를 하는 사람들의 인식도 달라져 과거처럼 동거사실을 은폐하기보다는 주위에 당당히 밝히고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싸워 나가고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실제로 지난 달 한 스포츠지가 최근 동거문화를 다소 부정적으로 기사화하자 한 온라인 동거인 동호회가 강하게 문제제기하여 언론사로부터 반론보도, 기사삭제 등을 약속받기도 했다.

동거 커플들은 “각자 독립성을 인정하면서도 일상을 공유할 수 있다”거나 “서로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다” 혹은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늘 긴장감을 늦추지 않으며 자기 개발에 신경을 쓰게 된다” 등의 경험을 근거로 ‘동거’를 전통적 가족패러다임을 변화시킬 대안적 가족형태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동거를 선택하는 이들 가운데는 “호주제가 싫어서” “가족제도 안의 가부장성이 싫어서” 등의 이유로 결혼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동거관계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대안적 동거 커플의 확산 현상에 대해 한국여성개발원의 변화순 수석연구위원은 “여성들의 교육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경제적 독립이 가능해졌고, 여성의 주체성에 대한 자각과 성적자기결정권이 확대된 데 따른 결과”라고 분석했다.

“불행한 결혼보다 행복한 동거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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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 남자친구와 동거를 시작한 지 1년 남짓 된 ㅂ씨(26)가 동거를 결심하게 된 동기는 주변의 결혼생활을 보면서부터다.

“친구들이나 선후배, 그리고 부모를 보아도 그들의 결혼생활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어요. 결혼과정이며 결혼 후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부과되는 각종 의무와 시집과의 관계 등이 부담스러웠죠.”

이런 생각에서 대학 졸업 후 소위 결혼적령기에 들어선 ㅂ씨는 자신이 아버지의 호적에서 남편의 호적으로 ‘옮겨지는’ 결혼 대신 양쪽이 서로 ‘만나는’ 동거를 결심했다. 남자친구도 흔쾌히 동의했다.

“동거 전 1개월 가량 남자친구와 참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생활비나 전세금 등 경제적인 문제며 가사분담과 출산문제 등 함께 살면서 부딪치게 될 과제들을 진지하게 토론했죠. 가장 큰 고민거리는 각자의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할까였는데 당당히 우리의 생각을 밝히고 강행하자는 결론을 내렸죠. 그리고 설날 연휴에 각자 집에 가서 이야기했어요.”

동거 3년차의 한 여성(35)은 아직 부모에게 동거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주위로부터 “결혼 안하냐”는 질문을 자주 받지만, 그는 동거를 하는 현재도 자신의 정체성을 ‘솔로’라고 생각한다.

“결혼 후 아내, 며느리 등 어떤 역할로 규정지어지는 것이 싫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한가지 방식만 있는 건 아니고, 결혼해도 이혼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아직도 사회인식은 ‘불장난’

양쪽 집안과의 관계 딜레마

각자 일을 하며 재산관리는 독립적으로, 가사와 생활비는 공평하게 분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이들 커플들은 주변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한다는 현실을 깨달을 때 가장 힘들다고 전한다. 이사라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동거에 대한 우리 사회의 높은 벽을 실감하게 된단다.

“‘왜 결혼사진이 없느냐’는 질문에서부터 ‘동거한다’고 밝혔을 때 편견의 시선으로 쳐다보거나 여자 명의로 집을 얻으려면 뭔가 문제있는 관계로 단정짓는 등 부당한 대접을 받을 때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직도 우리 사회는 동거를 독립적 의지에 의한 선택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책임감 없는 불장난쯤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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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동거를 택한 여성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남자 집안과의 관계이다. 남자 집에서는 동거 상태를 결혼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여 남자측 부모들이 상대 여성에게 며느리 역할을 요구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전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헌신적으로 도와준 게 고마워 남자친구 누나 결혼식에 함께 갔었어요. 그런데 그 후로는 명절이며 대소사에 계속 부르는 거예요. 안갈 수도 없고 가자니 스스로 용납이 안되고. 심지어 친구의 고모되는 분은 저를 따로 불러 부엌일을 시키고. 그런 일로 남자친구와 여러 차례 싸웠어요.”(ㅂ씨)

2년 정도 동거한 후 얼마 전 결혼한 ㅊ씨(28) 역시 양쪽 집안 문제로 갈등하다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결혼했다. 이왕 살 바에야 결혼을 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제 주변에 몇몇 동거하는 친구가 있는데, 대부분 이 문제로 고민하더군요. 둘 간의 문제는 금방 풀리는데 집안과 식구들이 얽히면 해결방법을 찾기가 어려워요. 처음 동거를 시작했을 땐 헤어질 때 힘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복병은 오히려 다른 데 있었던 거죠.”

한편 현행법상 동거는 사실혼 관계로 법률혼과 비슷한 법적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다. 또 민법 이외의 법률에서는 사실혼 부부를 법률상의 부부와 동일하게 다루는 규정이 있어 근로기준법시행령, 공무원연금법, 군인연금법, 사립학교교원연금법, 선원법 등에서 사실혼 관계에 있는 자를 배우자에 포함시키고 있다. 사실혼의 배우자 일방이 사망한 경우에도 주택임대차보호법은 다른 배우자에게도 임차권과 전세권의 승계를 인정한다.

상속권·전세자금대출 못받아

남자 인지안하면 자녀 불이익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제가 폐지되지 않은 현실에서 동거를 택하는 사람들이 감수해야 할 불이익은 여전히 존재한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호적의 변동이 없고 친족관계가 발생하지 않으며 상속권이 인정되지 않는다. 상속과 관련하여 특별연고자의 재산분여청구가 가능하지만 이는 상속인이 존재하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즉 동거 커플 중 남자가 사망했을 때 자녀가 있고 이를 남자가 인지했다면 자식이 상속인이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남자의 아버지나 형제자매 등 남자 가족에게 상속인 자격이 주어지므로 동거 여성은 상속을 받기 어렵다.

또 자녀는 혼인중의 출생자가 되지 못하므로 남자가 따로 인지신고를 하지 않으면 자녀는 여자의 성과 본을 따라 모가에 입적, 여자의 친권에 복종하도록 돼 있다. 뿐만 아니라 은행으로부터 전세자금대출을 받을 경우도 반드시 부양가족이 있는 세대주에 한하므로 무자녀 동거 커플은 대출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편법으로 20세 미만, 60세 이상의 소득원이 없는 부양가족이 동거인으로 등재돼 있는 경우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즉 형제자매나 부모 등을 동원하면 편법이지만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또 교사 커플의 경우 각각 다른 지역에 발령 받았을 때 법률혼 관계임을 입증하면 즉시 같은 지역에 배치되지만 동거 커플의 경우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오히려 동거 사실이 밝혀지면 임용 자체가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라 떳떳하게 밝힐 수도 없다. 제도적 차별은 없어도 현실적 차별에 의해 동거인들이 불가피하게 동거 사실을 숨기게 되는 한 원인이다. 이밖에 남자가 아내의 출산시 유급휴가를 신청할 수도, 가족수당을 받을 수도 없다.

결혼에 대한 가치관 변화 ‘급류’

호주제 폐지, 불이익 최소화 길

이런 사회적 편견과 제도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동거를 선택하는 커플이 늘고 있는 것은 기존의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해 말 통계청이 발표한 ‘2000년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98년 현재 20대 여성의 경우 결혼을 ‘선택’으로 생각하는 사람(42%)이 ‘필수’로 생각하는 사람(13.5%)보다 3배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99년 여의도연구소 진수희 연구위원이 서울 및 수도권 소재 13개 대학의 4년제 대학 4학년 여학생 52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취업은 필수이고 결혼은 선택’이라고 답한 여대생이 전체 응답자의 81%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작년 10월 오픈한 웹사이트 ‘동거닷컴’에는 2개월만에 4000여 명의 회원이 등록했고, 이 가운데 동거를 목적으로 가입한 정회원도 400여명이라고 업체측은 전한다. 이보다 앞서 문을 연 ‘프리솔로’도 최근 유료로 전환하기 이전까지 7만4000여명의 회원이 이용했다.

민우회 가족과성상담소 권수현 부장은 동거의 현재적 의미를 “결혼만이 정상이자 유일한 가치라고 강요했던 데서 이혼율 증가, 결혼율 감소, 결혼연령 상승 등 가족구조의 변화와 함께 한부모가족, 동성애가족 등 다양한 가족형태가 자리잡기 시작하는 과도기에 가족패러다임을 바꿔가는 대안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이러한 자발적 선택에 의한 동거가족이 결혼제도에도 영향을 미쳐 결혼을 필수조건이 아닌 선택사항으로 바꿔가고 있다”고 말했다. 즉 결혼이나 동거 혹은 그밖의 다른 형태의 가족으로 선택의 폭이 넓어져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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