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시리즈 여주인공들

가족 내 존재 ‘여성’ 위치에 대한

여성주의 문제제기 드러낸 캐릭터

 

시리즈 올라갈수록 남편찾기 퇴행

‘1988’ 여주인공은 여성주의적으로

각성되나 물질적 기반 없는 지금의

젊은 여성들의 좌절된 욕망 반영

 

‘응답하라 1988’의 덕선(왼쪽 둘째)은 가족 내 ‘둘째 딸’이라는 위치에서 경험하는 차별을 쉽게 수긍하지 않고 저항한다. 또 성보라는 부모의 반대에도 운동에 투신하며 자신을 통제하려는 남자친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마”라고 소리친다. ⓒtvN
‘응답하라 1988’의 덕선(왼쪽 둘째)은 가족 내 ‘둘째 딸’이라는 위치에서 경험하는 차별을 쉽게 수긍하지 않고 저항한다. 또 성보라는 부모의 반대에도 운동에 투신하며 자신을 통제하려는 남자친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마”라고 소리친다. ⓒtvN

현직 대통령이 탄핵, 구속된 초유의 사태 이후 치러진 이번 대선은 그 자체로 한국 사회의 변화를 드러냈다. 개인적으로는 그간 선거의 결과를 결정해 온 ‘북풍’은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 반면 성소수자 이슈가 공방할 만한 의제로 부상했다는 점이 가장 흥미롭다. 오랫동안 한국정치 지형을 결정해 온 안보, 민주화, 지역갈등 외에 새로운 의제가 등장한 것이다.

물론 오고간 말들을 듣는 순간 치솟는 분노를 참기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소수자 이슈가 대선판에서 진영을 가르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로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성소수자 운동의 성장을 드러낸다고 볼 수도 있다. 이제 누구도 이 이슈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문제는 오히려 다른 데 있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일찌감치 선언한 문재인 대통령이 이후 성소수자 이슈가 제기되자 ‘군대 내 동성애’에 대해 반대하며, 차별금지법도 동성혼을 인정하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기 때문에 당장 제정이 어렵다고 입장을 밝혔다. ‘여성주의적 정책’을 추진하고 실행하겠다는 적극적 약속이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유보적인 태도와 무리없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아다시피 차별금지법은 다른 차별들과 더불어 성 정체성 또한 그 이유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기본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때문에 이런 태도는 시쳇말로 여성주의 진영과 성소수자 진영을 ‘갈라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이때 여성주의(페미니즘)는 무엇인가? 군대 내 동성애와 성폭력도 구분하지 않고, 사회적 합의 부족을 이유로 차별금지에 관한 기본법 제정을 유보하는 여성주의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미뤄 짐작컨대 여기서 여성주의는 이성애자로 가정된 여성에 대한 폭력을 ‘근절’하고, 그녀들이 일과 가정을 ‘양립’시킬 수 있도록 해서 되도록 출산율을 높이는데 기여하는 일종의 정책적 기술일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이 새삼스럽지만은 않다. 여성주의자들은 이미 한국 여성주의의 (이성애) 가족 정치화를 성찰적으로 분석, 제기해왔다. 그렇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때 가족은 한국의 고유한 문화가 아니라 지난 20년 동안 한국적 신자유주의가 심화시킨 위험과 불안을 방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관계이자 제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번 대선의 소위 ‘동성애 논란’은 특정 정당이나 후보의 선호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 이 논란은 1987년 체제와 1997년 체제를 경유하며 결합된 여성주의, 신자유주의 그리고 (이성애) 가족 정치의 심화와 관련된 현재적 상황을 드러낸다.

일어나고 깨어난 딸들은 어디로 갔는가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가 이런 상황을 읽기에 더없이 적절한 텍스트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할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 2010년대 이후 회고의 대상이 된 1990년대라는 시기를 이보다 더 잘 그려내지는 못 했다고 이야기된 바로 그 ‘응답하라’ 시리즈 말이다.

2012년 여름 첫 시리즈 ‘응답하라 1997’를 방영한 이래 이 드라마는 매번 케이블 TV로서는 놀라운 시청률과 화제를 낳으며 90년대에 대한 특정한 상을 대중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 만큼 이 드라마에 대한 말들은 무성한 편이었지만 이 시리즈가 재현하는 여성성과 남성성, 가족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말은 극히 인색했다. 몇몇 저널리즘 분석은 이 시리즈가 신데렐라 서사의 변종일 뿐이라고 일갈했는데, 시원하기는 하지만 만족스럽지는 않다. 여성학자 김은실이 2001년 ‘성적 주체로서의 여성의 재현과 대중문화’라는 글에서 쓴대로 대중문화가 재현하는 젠더와 섹슈얼리티는 그 자체로 불변하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반영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적 맥락 그리고 그와 관련 있는 성별 체계와의 관련 속에서 설명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볼 때 이 시리즈가 자리하는 1990년대라는 시대에 우선 주목하게 된다. 다들 아다시피 1987년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환을 이끈 것은 민주화와 자유(주의)화라는 두 개의 바퀴였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여성주의와 성정치는 이를 주도한 가장 중요한 흐름이었는데,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도 이를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다.

우선 이 시리즈의 여자 주인공들은 전형적인 여성성의 소유자들이 아니다. ‘응답하라 1997’의 성시원, ‘응답하라 1994’의 성나정은 ‘빠순이 둘째 딸’이며, ‘응답하라 1988’의 성보라는 순종과 희생과는 영 거리가 있어뵈는 ‘서울대 간 첫째 딸’, 성덕선은 공부 못 하는 ‘둘째 딸’이다.

시원과 나정은 ‘빠순이질’을 못마땅해하는 아버지에게 대놓고 ‘덤빈다’. 부모의 반대에도 운동에 투신한 보라는 자신을 통제하려는 남자친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마”라고 소리치며, 언니인 보라와 모든 점에서 반대인 듯 보이는 덕선 또한 가족 내 ‘둘째 딸’이라는 위치에서 경험하는 차별을 쉽게 수긍하지 않고 울며 소리친다. 말하자면 그녀들은 1987년 이후, 가족 내 존재로 한정되는 여성의 위치에 대한 한국 여성주의의 문제제기를 구체화한 캐릭터들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시청자들이 느끼는 즐거움의 상당부분은 바로 이처럼 생생하고 구체적인 여자주인공들에게서 비롯된다.

그렇지만 그녀들의 ‘빠순이성’과 더 이상 딸이기만 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뜬금없이 웃음을 유발하거나 남성과의 관계에서 해소되는 일시적인 것으로 재현된다. 예컨대 학생운동집단 내에서 첫 연애를 한 보라는 그가 자신의 친구와도 몰래 사귀고 있음을 알고 헤어지려고 한다. 이를 안 보라의 남자친구는 사과를 하기는커녕 ‘여자답지 않은’ 보라를 나무라며 폭력적으로 돌변하는데, 결국 이 상황은 보라가 이웃집 고등학생 연하남 선우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면서 끝난다.

우리는 양다리를 걸치고서도 당당하고 폭력적인 남자친구에게 그렇게도 똑똑한 보라가 어떤 감정을 느끼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단지 학생운동 내 성별화된 일상문화에 대한 문제제기의 흔적만을 미뤄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10대 여성 팬덤의 경우에도 아버지에게 ‘덤비고’ 남자친구를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장에 ‘끌고 가는’ 젊은 여성들의 에너지를 그리는가 싶지만 상품경제 그리고 그와 관련 있는 대중문화의 만개라는 맥락으로 그 의미가 한정되기 때문에 1987년 이후라는 시대적 변동을 오히려 망각시키는 효과적인 매개로 위치된다.

이런 면에서 ‘응답하라’ 시리즈 전체에 걸쳐 부모로 등장하는 배우 성동일과 이일화의 존재는 의미심장하다. 이 시리즈의 주요 여성인물들은 모두 그들의 ‘딸’로 등장한다. 본명을 극중 인물명 그대로 사용하는 이들은, 배우가 가진 실제 분위기와 허구의 인물 사이를 매끄럽게 연결하며 1990년대의 아버지와 어머니 상을 구현한다. ‘말투는 억세지만 남을 거둬 먹이는데 인색함이 없는’ 어머니와 ‘겉으로는 퉁퉁거리지만 실은 따뜻하고 다정한’ 아버지는 1990년대라는 판타지적 공동체의 절정이다. 심지어 아버지 성동일들은 극중에서 만나기도 하는데, 이러한 장치는 ‘응답하라’ 시리즈의 젊은 여성주인공들이 다른 무엇보다 이 아버지의 딸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화한다. 그녀들은 이 부부의 딸이었다가 어릴 적부터 한 가족 같았던 남성과 결혼하는 것으로 성인이 된다. 가족을 벗어나 개인으로 성장할 기회를 영원히 갖지 못 하는 것이다.

 

‘응답하라 1994’의 배경인 ‘1990년대 중반 연세대’라는 시공간은 이 인물들을 야오이 장르물의 관습적 재현만으로 볼 수 없게 하는 당대의 맥락을 구현한다. ⓒtvN
‘응답하라 1994’의 배경인 ‘1990년대 중반 연세대’라는 시공간은 이 인물들을 야오이 장르물의 관습적 재현만으로 볼 수 없게 하는 당대의 맥락을 구현한다. ⓒtvN

‘좋은 게이 친구’와 가족적 여성유대

젠더와 섹슈얼리티 재현 측면에서 봤을 때 ‘응답하라’ 시리즈의 또 한 가지 특징은 동성애자가 주요 캐릭터로 등장한다는 것인데, 이는 1990년대 성정치의 영향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 ‘응답하라 1994’의 배경인 ‘1990년대 중반 연세대’라는 시공간은 이 인물들을 야오이 장르물의 관습적 재현만으로 볼 수 없게 하는 당대의 맥락을 구현한다.

‘응답하라 1994’의 빙그레는 선배인 재준(쓰레기)에게 애정을 느낀다. 그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성적에 맞춰 의대에 진학했지만 예술가가 되기를 꿈꾸는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다. 흥미로운 것은 빙그레의 동성 선배에 대한 욕망이 예술가로서의 미래에 대한 꿈과 겹쳐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예술가의 꿈을 포기하는 과정이 재준에 대한 애정을 거두고 여성에게 ‘욕정을 느낄 수 있는지’ 확인키스를 하는 상황으로 수렴되는 것에서 드러난다. 그는 2013년 ‘가족을 위해 꿈을 포기한 대가’로 의사 부부가 되어 ‘폼나게’ 살고 있다.

빙그레의 선택에 대해 나레이션은 “내 사랑하는 이들을 차마 밟고 넘어설 수 없어 끝끝내 스스로 꿈을 내려놓고” 말지만, “얼마 되지도 않는 드라마틱한 성공담 따위에 기죽어 스스로 좌절과 패배감에 휩싸일 필요는 없다”고 비장하게 말한다. 그리고 “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나를 바꾸는 결단, 꽤 괜찮고 폼나는 일”이라고 쐐기를 박는다. 여기에는 ‘살아남은 자들의 자기 위로’를 넘어서 스스로에 대한 위로를 필요로 하는 ‘자기 콤플렉스’가 자리한다. 예술가가 아닌 의사, 동성애자가 아닌 이성애자로서의 삶은 그 자체로 추구한 것이 아니라 ‘끝끝내 스스로 꿈을 내려놓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성애자로 순치된 빙그레와는 다르게 ‘응답하라 1997’의 준희는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인다. 우선 그의 윤제에 대한 애정은 ‘응답하라 1994’의 그것처럼 일시적이지 않다. 준희는 고등하교 입학 당시 성적 순서대로 자리를 배치하려고 하는 담임선생에게 반항하는 윤제에게 ‘첫 눈에 반한 뒤’부터 대학 입학 후 함께 사는 내내 그를 좋아했던 것으로 그려진다.

게다가 그는 시원의 HOT에 대한 팬심을 유일하게 이해하는 ‘섬세한 남자사람친구’이자, 공부와 운동을 모두 잘 하고 춤까지 잘 추는 ‘멋진 남자’다. 그러나 카메라는 다른 등장인물들이 현재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시시콜콜 보여주는 데 반해, 그의 현재 삶은 선팅된 자동차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버리는 것으로 처리한다. 준희의 현재 삶은 이 드라마 내에서 성시원의 ‘좋은 게이 친구’ 캐릭터로서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방영된 ‘응답하라 1988’에서는 동성애자는 등장하지 않지만 대신 여성 유대가 흥미롭게 그려진다. 주인공들의 엄마들로 등장하는 일화, 미란, 선영 사이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응답하라 1988’은 누군가의 엄마들인 그녀들을 삶과 관계에서 구체적 욕망을 가진 한 명의 개인들로 그린다. 미란은 연하 남편과의 성생활에 대한 불만을 코믹하게 보여주며, 선영은 고향 오빠인 무성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현실적으로 드러낸다. 또 그녀들이 엄마라는 역할 뒤에 감춰놓은 끼를 발산하는 장면들, 예컨대 전국노래자랑대회 예선 응모 등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흥미로운 장면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선영이 고향 오빠 무성과 결혼해 선우네와 택이네가 한 가족이 되고 다시 선우와 보라가, 택이 덕선과 결혼하면서 변화한다. 일화와 선영이 겹사돈을 맺어 ‘한가족’이 된 반면, 이사를 간 미란이 이들과 어떤 관계를 이어가는지 드라마는 보여주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가족 내 존재인 ‘엄마’로서 관계를 맺은 그녀들의 유대는, 가족의 상황이 변화할 때 그 영향 아래 놓이는 허약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응답하라 1994’의 나정과 도희가 별 특별한 관계가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1990년대 영 페미니즘과 성정치의 가장 중요한 의제 중 하나는 가족 내 존재가 아닌 여성들간의 우정 그리고 그 이상의 관계들이었다. 그러나 ‘응답하라’ 시리즈가 그리고 있는 여성 유대는 엄마라고 하는 가족 내 존재로서 혹은 ‘응답하라 1997’의 시원과 유정의 우정처럼 어린 시절에나 가능한 것이다.

즉 성인여성들이 가족과 상관없이 맺는 진지한 관계, 우정을 넘어선 성애적 관계 그리고 그 관계들을 통한 인식과 세상의 변화 추구는 이 시리즈의 관심사가 아니다. 여성들은 가족 내 존재로서만, 동성 간의 성애적 관계는 남성들간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그려진다.

‘응답하라 2017’을 기대하며

그리하여 ‘응답하라’ 시리즈는 젊은 여성 주인공들에게 가장 중요한 인생의 임무는 남편을 찾는 것이라고 우리를 설득한다. 인생의 파트너를 만나는 것은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 남녀는 서로를 타인으로 마주하고 갈등하며 그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사랑하게 되지 않는다. 그녀가 알고 보니 자신의 옆에 이미 있었던 남자들 중 한 명을 남편이 될 사람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물론 그는 공교롭게도 잘 생기고 돈도 잘 번다.

가장 최근에 방영된 ‘응답하라 1988’에서 ‘어남류’와 ‘어남택’ 간 대결은 ‘남편 찾기’ 장치의 정점을 보여준다. ‘응답하라 1997’에서는 판사와 벤처 사업가 출신 대통령 후보, ‘응답하라 1994’에서는 의사와 메이저리그 야구선수로 제시된 두 남편 후보들 중 여주인공은 둘 중에서 덜 성공했으나 여자인 자신보다는 훨씬 ‘잘 나가는’,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너나없이 자라와 다소 ‘만만하게’ 굴 수 있는 남성을 남편으로 ‘선택’했다.

그렇지만 ‘응답하라 1988’에서는 직업군인과 천재 프로 바둑 기사 중 후자가 선택된다. 어릴 때부터 한 달에 1억씩 벌고, 훨씬 강도 높은 돌봄노동을 필요로 하는 택이가 덕선이의 남편이 된다는 결론은 우리의 현재가 이 시리즈가 거슬러 올라가 재현하는 과거와 겹쳐지면서 점점 더 퇴행한다는 현실감을 증폭시킨다.

이쯤해서 우리가 성찰해야 할 것은 한국 여성주의의 가까운 과거가 아닐까? 2000년대 이후 여성운동이 의도한 정치적 주류화의 성과는 가시적이었지만, 경제적 주류화는 그렇지 못 했으며 오히려 여성노동이 주변화 현상은 가속화됐다. 여성학자 김경희는 2009년 ‘신자유주의와 국가페미니즘’이라는 글에서 한국의 국가페미니즘이 2000년대 이후 여성주의적 의제에서 가족 의제로 그 중심을 변화시키면서 안착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으며, 여성학자 박혜경은 2011년 ‘경제위기시 가족주의 담론이 재구성과 성평등 담론의 한계’라는 글에서 평등 정책과 담론이 가장 활발했던 민주화 시기에 한국의 페미니즘은 성별분업적 정상가족을 제대로 해체하지 못했고, 오히려 전업주부의 위상을 높이는 담론에 일조하기도 했다고 일갈했다.

1980년대 말 대학에 입학해 운동가이자 비혼여성으로 살아온 이들을 연구한 송제숙은 『혼자 살아가기』라는 책에서 그녀들의 필요가 한국 여성운동의 정책 의제로 인식되지 못 했다가 지적했다. 나이와 결혼 규정이 여전이 명시돼 있는 주택 대출 정관과 가족 중심의 돌봄 의제화는 그 좋은 예다.

결혼하지 않고서는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1차적으로 필요한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고, 정당한 노동의 권리와 댓가를 향유할 수 없는 여성들이 여성주의적 메시지에 노출됐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측면에서 본인보다 월등히 잘난 남자로부터 ‘집’을 받고, 나보다 잘 낫지만 ‘만만해서’ ‘협상가능한’ 남자와 결혼을 하는 ‘응답하라 1997’과 ‘응답하라 1994’의 여주인공들 그리고 이 둘을 통합시켜버린 ‘응답하라 1988’의 여주인공은, 여성주의적으로 각성됐으나 그 각성을 지속시킬 물질적 기반이 없는 지금, 여기 젊은 여성들의 좌절된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이쯤에서 ‘응답하라’의 다음 시리즈가 궁금해진다. 새로운 정부 아래서 이 시리즈는 어떤 시대의 어떤 남녀들을 그리게 될까? 지금 우리들 각자가 꿈꾸는 세상은 조금씩 다른 모습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인생의 해법을 오로지 연애와 결혼 그리고 가족의 확장으로만 상상해야 하는 세상에서는 역설적으로 연애, 결혼, 가족 모두 행복하기 어렵다.

그간 여성주의는 (이성애) 연애와 결혼, 가족을 뒷받침하는 정책의 기술로 주로 실행됐다. 그렇지만 그 결과 만들어지는 세상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철학 없는 정책은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도, 지속가능할 수도 없다. 여성주의 의제와 성소수자 의제가 갈라쳐지지 않는 사회, 여성주의가 정책의 기술이라기보다 대안적 세계의 인식론으로 이해되는 새 시대를 기대한다. 

필자 김신현경씨는

현재 독일 베를린자유대 동아시아대학원 박사후연구원으로 있다. 여성주의 연구모임 FICT 멤버. 공저 『섹슈얼리티 강의, 두 번째 이야기』,『일상의 여성학』, 공역『성적 차이, 민주주의에 도전하다』가 있다. 최근에는 미디어 경제와 노동, 우리 시대 사랑과 연애의 변동, 여성주의 문화연구의 급진적 재구성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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