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서 만나 일시적 재결합

임시 관계망 비슷한 가족관계

 

가출 10대 여성의 집 밖 생활

개별화된 생존으로 이동 중

 

가출한 10대 여성 희수는

왜 ‘조건 동거’에 빠졌나

10대 성 상품화가 빚은 결과

 

이제 사회는 더 이상 개인적 불운에 대한 집단적 개선책을 보장하지도 약속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사회는 개인의 자원이 많은 사람은 사람대로, 적은 사람은 적은 사람대로 자신이 자원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자원화하면서 불확실한 삶 속에서 살아남는 것을 가장 큰 과제로 삼게 만든다.

‘손해를 덜 볼 권리’중시하는 시대의

가족 관계와 생존의 개별화

이때 옳은 것과 그른 것, 공정한 것과 불공정한 것, 적당한 것과 비적당한 행위사이의 구분을 위한 유일한 규범적 척도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개인주의와 경쟁주의일 것이다. 빈곤층의 가정은 상상 이상의 변형을 경험하고 있고 이 가정에서 방출된 10대들은 각자 생존 전략을 찾아 살아남아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김은실 이화여대 교수는 신자유주의가 개인을 행위의 주체로 상정하면서 개인이 가진 모든 것을 자원화하고 동시에 많은 부분에서 개인의 자발성이 만들어질 수 있는 여지도 더 커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맥락에서 이 시대에 ‘성적’이라는 것 역시 더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2005년). 가족의 해체와 생존의 개인화가 진행되는 사회에서는 성과 친밀함을 둘러싼 어떤 새로운 종류의 관계가 등장하고 있을까?

이전에 사회적 자원이었던 가족은 더 이상 사회적 자원이 아닌 개인적 위험과 부담이 돼가고 있고 이에 따라 가족 구성원은 물질적으로 정서적으로 서로를 분리하는 것을 선택하고 있다. 자원이 없는 가족일수록 이 결과는 자명해진다. 개인은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책임지는 것 외에 거의 다른 선택이 없게 된다. 과거 가출, 성매매 여성들이 폭력, 과도한 노동, 방임 등의 이유로 집으로부터 가출을 했다면 이제는 부모와 자녀들이 본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족을 부담스러워 하며 가족을 떠나거나 임시적으로 재결합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부모의 이해관계에 따라 깨짐과 일시적 재결합을 반복하면서 이들의 가족은 거리에서 만나 일시적 재결합을 반복하는 임시적 관계망과 점차 유사해지고 있다.

지수(가명)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아빠가 집을 일방적으로 떠난 후 엄마와 외조부모의 집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1년여를 살던 중 엄마가 말없이 집을 떠났고 그는 외조부모와 함께 어렵게 살아가게 됐다. 그렇게 떠났던 엄마는 4년 후 다시 지수를 데리러 왔고 본인이 재혼한 남성의 집으로 지수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러나 엄마의 재혼은 또 다시 불화를 겪었고 엄마는 지수를 데리고 집을 나와 본인이 교제한 또 다른 남성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지수가 엄마의 새 동거남과 적응하지 못하고 가출을 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지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네 엄마 이 집에서 나갔다’는 동거남의 말뿐이었다. 반복적으로 엄마에게 버려진 지수는 본격적으로 가출 생활을 시작했다. 가출 생활을 하며 얹혀살던 아는 지인들의 집에서 지수는 본인처럼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났다. 자신과 가출 생활을 함께 했던 언니와 함께 그 언니의 집에 들어갔을 때 그 집에는 그 언니의 이모가 버려두고 간, 누구에게도 충분히 돌봄을 받지 못한 어린 아이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집과 자녀를 떠난 부모들이 향후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는 것도 아니다. 부모들은 본인의 필요에 의해 자신이 떠난 자녀들과 다시 조우하기도 한다. 이러한 부모 자녀 관계는 마치 거리나 인터넷에서 필요에 의해 서로 만나 도움을 주고받는 익명적 관계의 모습과 유사하다.

민희(가명)는 함께 노래방에서 일하던 남녀 3명과 함께 새로운 삶을 찾아 제주도로 떠났다. 노래방 도우미와 웨이터로 일하던 이들은 유흥업의 일을 중단하고 성실하게 일해서 잘 살아보자는 꿈을 가지고 제주도에 가서 월세 방을 얻고 각각 배달, 음식점 서빙 등의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며 제주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남자친구 중 한 명의 아버지가 일 때문에 제주도에 왔다.

마땅히 머무를 곳이 없었던 아버지는 자신이 집을 떠난 후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아들과 페이스북으로 접촉해 아들이 친구들과 자취를 하는 집에 와서 신세를 지고 떠났다. 마치 가출 생활 중 알게 된 지인이 갈 곳이 없자 예전에 같이 지내던 사람에게 연락해 며칠 신세를 지고 떠나는 양상과 흡사하다. 이러한 점은 부모와 가족 관계가 서로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단절되고 다시 일시적으로 결합하는 익명적 관계의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는 점을 보여준다. 이렇게 헤어진 부모는 시간이 흘러 페이스북의 친구 찾기 기능으로 자녀들에게 접촉을 시도하기도 한다.

가출 후 동거하는 자식의 집에 와서 신세를 지고 가는 아버지, 자녀를 떠난 후 연락을 단절하다 어느날 광고성 메시지처럼 느닷없이 페북 메시지를 툭 한번 던져보는 어머니의 등장은 단지 개념 없는 비정한 몇몇 개인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내가 가진 자원에 기대어 자기 충족적으로 나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최선으로 조장하는 흐름이 인간관계와 결합하고 있는 것에 관한 문제다. 이러한 가족의 관계는 생존의 개인화가 이뤄지고 있는 사회에서 개인의 편의와 이해관계에 따라 관계의 유지와 전환에 대한 선택이 유연하게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거래와 친밀함, 일상과 폭력이

혼재된 관계의 형성

과거 원조교제 경험이 있던 10대 여성들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어떤 한 범주에 정박시키지 않았다. 이들은 낭만적 연애를 할 수 있는 상대와 물주가 될 상대 그리고 가볍게 놀고 끝낼 남성을 세분화시켜 관계의 맥락에 따라 다른 정체성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반면에 한 관계 안에서 범주의 이동이 전환되는 모습은 보기 어려웠다. 그들은 각기 다른 관계의 구분을 철저하게 지켰고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인격을 지키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10대 가출 여성들이 이전과 다르게 보여주고 있는 뚜렷한 차이는 한 관계 안에서 연애 관계와 성매매 관계의 상호 전환을 유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있다.

친밀한 관계와 거래적 관계가 상호 전환되는 현상은 일상적 친밀함, 섹스, 심지어 가사노동을 싼 값에 해결하고자 하는 남성들의 등장과 맞물린다. 결혼 가능성에서 배제됐으나 여성을 통한 성적 욕구, 가사노동의 해결, 일상적 관계에 대한 해소 욕구를 지닌 남성들은 자신이 가진 주거의 자원을 미끼로 10대 여성들과의 동거를 통해 유사 연애, 유사 결혼의 관계를 수행하고 있다.

희수(가명)는 인터넷을 통해 가사노동을 해 주는 대신 숙식을 제공할 남성을 구하게 됐다. 최근 등장하고 있는 조건 동거의 새로운 유형 중 하나는 과거처럼 섹스를 대가로 숙식을 제공받는 것이 아니라 가사도우미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신 숙식을 제공받는 유형이다. 이 동거의 유형 안에는 룸메이트, 가사도우미, 조건 동거 등 기존에 서로 구별됐던 경계가 점차 무뎌지며 섞이고 있다.

부모가 이혼한 뒤 엄마와 아빠가 자녀의 양육을 조부모에게 맡기고 연락을 끊어버린 상태에서 자란 희수는 조부모의 학대를 피해 집을 나왔다. 숙식이 필요해진 희수는 요리, 청소, 세탁 등의 일체의 가사노동을 해 주는 대가로 숙식을 제공받는 조건 동거를 시작했다. 이 관계에서 성관계는 계약 조건에 들어 있지 않았던 만큼 희수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그 남성이 집에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녹음기를 작동시키고 이를 남성에게 인지시켰다. 그러나 명백한 교환관계로 시작했던 동거는 어떤 경험을 함께 쌓아가며 좀 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집에 함께 머물며 자신이 만든 요리를 함께 나누어 먹고 자신이 청소하며 관리한 공간에서 누군가와 함께 일상을 보내는 경험은 자신과 상대방 모두에게 감정의 변화를 불러왔다. 동거하던 남성이 희수에게 먼저 감정이 생긴 것을 알고 난 후 희수는 그 집에 더 머무르기 위해 그 남성의 기대에 부응하기 시작했고 점차 관계는 연애와 같은 관계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같이 커플티를 맞추고 여느 연인들처럼 놀이공원에 놀러가고 근교로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희수는 그 집에서 더 머무르기 위해 ‘연애와 같은 관계를 수행’했으나 ‘연애감정’은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강요에 의한 선택이거나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거래적 관계도 아니었다. 그렇게 동거관계를 지속하던 중 남성의 집착이 지나쳐짐에 따라 희수는 그와 헤어지고 그 집을 나왔다.

10대 여성들이 이런 조건의 동거를 하게 되는 이유는 단순히 경제적 이유로만 환원되지는 않는다. 이들의 집 밖 생활은 집단적 또래 문화로부터 개별화된 생존으로 점차 이동해 가고 있다. 혼자 고시원이나 모텔의 달방을 잡아 놓고 인터넷으로 상대를 구하고 그날 그날의 숙박비와 끼니를 해결하며 일이 없을 때는 PC방에 가서 게임을 하거나 자고 혼자 패스트푸드를 시켜먹는 생활은 이들을 정서적으로 지치게 만든다.

지영(가명)은 계속 되는 혼자 생활에 지쳐 만남용 앱 중 하나인 ‘즐톡’에서 그냥 만나서 노래방 가고 같이 놀 남성을 한 명 구하게 되었다. 지영의 표현대로 ‘외로워서’였다. 이 만남은 애인대행 알바처럼 돈을 받고 성관계와 스킨십을 허용하며 유사 애인의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종류의 관계는 아니었다. 지영은 이 남성과 만나 금전적 거래 없이 피시방이나 노래방을 가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그 남성이 서울에서 혼자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 자기 사정을 이야기 했고 그 남성은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

집으로 들어가고 난 뒤에도 그 남성은 여전히 잘 대해줬지만 남성이 퇴근한 6시 이후부터는 시도 때도 없이 그의 성적 요구에 시달렸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그렇다고 관계가 섹스로만 환원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이 퇴근하기 전 지영은 간단한 가사노동을 하고 남성이 퇴근한 후에는 같이 밥 먹고 이야기 하며 놀기도 했다. 하루에도 4, 5번씩 요구하는 성적 요구가 힘들었지만 다른 곳에 가는 것이나 여기나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아서 지영은 그 집에 계속 머물렀다. 지영의 관계는 지영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면서 끝이 났다.

지영이 지냈던 남성의 집은 함께 밥을 먹고 하루에 있었던 일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일상적 공간이기도 했으나 원치 않는 성적 관계가 이뤄지는 공간이기도 했고, 그런 그를 위해 빨래와 청소를 하는 공간이기도 했으며 그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처럼 여성들은 명백한 교환 관계로 시작했다가 감정이 모호하게 개입된 관계로 미끌어지기도 하고 연애 감정을 동반한 채 시작했으나 그 감정을 뒷받침해 줄 만한 이유들이 사라졌을 때 경제적 이익을 위해 관계를 끝내지 않고 교환적 관계로 전환시키기도 하였다. 이때 이 관계는 일상적 친숙함이 완전히 배제된 성매매로만 규정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일상을 함께 나누는 평범한 동거로 보기도 어렵다.

자신의 생존, 이익, 손해를 덜 볼 권리를 중시하게 만드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기존에 구획됐던 관계의 경계를 가로질러 미끄러지면서 어딘가에 명확하게 정박하지 않은 관계와 감정을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제 관계를 규정지었던 이분법적 프레임을 넘어서서 진행되는 관계의 혼종성을 다룰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한 때임을 보여준다.

필자 민가영 교수는

 

이화여대 여성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여대 교수. 문화적 패러다임으로써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근대적 이분법이 더 이상 작동 불가능해지는 현상에 관심을 두고 있다. 10대 여성들의 성문화를 중심으로 인간들 간의 관계, 자기 승인의 문제, 가해/피해 중첩성이 일어나는 영역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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