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광고 속 헐벗은 여신들
게임 광고 속 헐벗은 여신들
  • 이세아 기자
  • 승인 2017.02.14 20:57
  • 수정 2017-02-18 17: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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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모델 성적 대상화·상품화하는 디지털 게임 광고

‘남성 유저’만 겨냥해 기획·홍보해온 게임업계

여성의 존재를 무시하고 배제하는 위험한 전략

“진정한 게임 강국 되려면 젠더적 가치에 대한 논의 시작해야”

 

걸그룹, 래퍼, 레이싱걸, 배우, BJ(인터넷 방송 진행자), 피트니스 모델.... 요즘 디지털 게임 광고엔 여성들이 빠지지 않는다. 1인칭 총싸움(FPS) 게임, MMORPG(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 소셜네트워크게임(SNG)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이 광고들은 하나같이 모델의 ‘여성성’을 강조한다. 2016년 1월부터 2017년 1월까지 공개된, 여성 모델이 나온 광고 50개 가운데 34개(약 70%)가 게임의 맥락과는 무관하게 여성의 신체를 노출하거나 특정 신체 부위를 강조했다. 유혈이 낭자한 전쟁터를 배경으로 선 여성들은 남성용 흰 셔츠만 입거나, 상의를 반만 걸친 채 속옷과 가슴골을 노출하거나, 착 달라붙는 피트니스 의상을 입고 미소 짓는다. 10개(20%) 광고는 “하고 싶지 말입니다” “나를 길들여줘” 등 노골적인 성적 메시지를 날리는 여성을 그렸다. 고유한 인격과 의지를 가진 여성 주체라기보다는, 남성의 성적 욕망을 그대로 투영한 이미지다. 

전통적으로 디지털 게임업계는 철저히 남성 유저를 겨냥해 콘텐츠를 홍보해왔다. 2010년 이전까지는 주로 강한 남성성을 지닌 전사들이 게임 포스터나 트레일러에 등장했다. 2015년엔 배우 이정재, 장동건, 정우성, 차승원, 하정우, 올랜도 블룸 등이 게임 모델로 나서 화제가 됐다. 지금은 ‘여신’이 대세다. 하지만 게임을 실제로 해보면 ‘여신’의 존재감은 없거나 미미한 경우가 많다. 많은 여성들이 한낱 눈요깃거리로 소비되고 있는 셈이다.

 

2015년엔 남성 모델들이 대거 게임 광고에 등장해 화제에 올랐다. 왼쪽부터 배우 차승원, 정우성, 이병헌이 모델로 나선 게임 광고.
2015년엔 남성 모델들이 대거 게임 광고에 등장해 화제에 올랐다. 왼쪽부터 배우 차승원, 정우성, 이병헌이 모델로 나선 게임 광고.

 

2016년, 여성 모델이 등장하는 게임 광고들.
2016년, 여성 모델이 등장하는 게임 광고들.

업계는 “핵심 소비자인 남성층을 겨냥해 광고를 만들었을 뿐, 여성혐오적이거나 성 편향적인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유사한 콘셉트의 게임이 매일 쏟아지는 상황에서 유저들의 주목을 끌려면 미녀 스타만한 상품이 없다”고 한 관계자는 말했다. “걸그룹이나 신인 모델은 자신들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각종 오프라인 게임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임하는데, 그 팬들이 게임으로 유입되는 등 홍보 효과가 톡톡하다”고 했다.

남성이 여성보다 디지털 게임을 더 많이 하는 것은 사실이다. 2016년 기준 남성은 73.8%, 여성은 61.9%가 게임을 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있다. 온라인 게임 남성 유저(51.2%)의 수는 여성(25.2%)의 두 배 수준이다(한국콘텐츠진흥원, ‘2016 게임이용자 실태조사 보고서’). 여성은 상대적으로 게임에 관심이 없고, 액션이나 슈팅 게임 등 ‘남성 장르’엔 더욱 무관심하다는 게 게임 시장에서의 통념이다. 

그러므로 남성 유저를 고려해 여성을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묘사하고, 타자화하는 게임 광고는 타당한 전략일까? 여성 소비자의 존재를 무시하고 배제하는 위험한 전략은 아닐까? 게임 속 여성 캐릭터를 연구해온 한혜원 이화여대 융합콘텐츠학과 부교수는 저서 『앨리스 리턴즈』에서 이 문제를 꼬집는다. “남성의 성적 욕망을 게임에 표면적으로 반영하는 순간, 여성 플레이어의 욕망은커녕 존재 자체가 배제될 수 있다”다는 것이다.

“게임 세상엔 남성만 존재하는 게 아니잖아요.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남성’이 아닌 이들을 얼마나 게임 시장에 끌어들일 수 있느냐가 앞으로 게임 업계의 성패를 좌우할 겁니다. 다양한 유저들의 니즈와 성향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의 젠더만 겨냥해 홍보하는 건 게으르다고밖엔 볼 수 없어요.” 현직 광고 AE이자 여성 게이머인 김미라(32) 씨의 말이다.

 

적지 않은 게임 광고가 여성을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만 묘사하고 있다.
적지 않은 게임 광고가 여성을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만 묘사하고 있다.

 

게임 속 여성 캐릭터의 섹스어필에 치중해 비난을 받은 넥슨의 온라인FPS게임 ‘서든어택2’ ⓒ서든어택2 트레일러, 게임화면 캡처
게임 속 여성 캐릭터의 섹스어필에 치중해 비난을 받은 넥슨의 온라인FPS게임 ‘서든어택2’ ⓒ서든어택2 트레일러, 게임화면 캡처

남성 유저만을 겨냥한 게임 홍보와 기획은 실제로 독이 될 수 있다. 지난해 넥슨의 온라인FPS게임 ‘서든어택2’는 트레일러를 공개한 날로부터 여성 캐릭터의 성 상품화와 선정성 문제로 질타를 받았고, 23일 만에 서비스 종료됐다. 대형 게임사가 준비한 야심작의 ‘쓸쓸한 퇴장’은, 젠더에 대한 고민 없이 게임을 기획·개발·홍보해온 한국의 풍토를 돌아보게 했다.

“게임은 단순 소모품이 아니라 문화적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인간의 가치관에 영향을 준다. 반드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디지털 게임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나와 버렸다”고 한 교수는 지적했다. 그는 게임업계의 특성상 “상업적 이윤과 젠더적 가치 사이의 딜레마’”가 존재한다면서도, “게임 강국을 자처하는 한국에선 디지털 게임과 관련된 젠더에 대한 문제 제기는커녕 논의조차 제대로 진행된 적 없다”고 비판했다. 수익과 젠더적 가치 사이, 한국 게임업계의 줄타기는 언제쯤 시작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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