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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 만드는 디자이너 이정혜 도잠 대표 잘나가던 그래픽 디자이너, 출산·육아 후 전통 목공 배워 가구 디자이너로 새출발 여성 작업 공동체 ‘도잠이’ 이끌어 “여성의 삶·정체성 깃든 가구 만듭니다”

[인터뷰] 40대에 가구 브랜드 런칭...딸 낳고 인생 2막 연 디자이너

2024. 03. 23 by 이세아 기자

 

이정혜 도잠 대표. ⓒ이정혜 대표 제공
이정혜 도잠 대표. ⓒ이정혜 대표 제공

45세에 가구 브랜드를 이끄는 디자이너가 됐다. ‘여성이 만들고 여성이 쓰는 가구’를 판다. ‘인생 2막’을 연 지 7년 차, 이정혜 도잠 대표는 들려줄 이야기가 많다. 

1972년생 이 대표는 잘나가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20~30대를 보냈다. 1996년부터 18년간 그래픽 디자인 회사 ‘베가스튜디오’를 운영했다. 2002 광주비엔날레 ‘멈춤’, 도시형 대안학교 이우학교 디자인 등 흥미로운 작업을 선보였다.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작지만 강한 회사’로 명성을 쌓았다. 디자이너의 영역이 좁던 시대, 기업 소속 인하우스 디자이너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걸 보여줘 후배들의 롤 모델이 됐다.

디자인의 사회적 역할에도 관심이 많았다. 관련 매체 작업·전시 기획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2012년 다른 디자이너들과 함께 디자이너의 일과 삶에 대한 책 『디자인 확성기』를 펴냈다. 홍대 근처의 빈 건물을 예술인들이 무단 점거해 창작 거점으로 삼는 스쾃(squat) 운동에도 동참했다. “페미니스트가 아닌 남자와 결혼하긴 싫었고, 누가 봐도 여성 권리에 관심 많고 관련 활동을 조직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2009년 딸을 낳으면서 큰 변화를 맞았다. 출산 한 달 전에 개인전 ‘주거 연습’(아트선재센터)을 열었는데, 이후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회사를 정리하고 몇 달간 집에서 아이만 봤다.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앞으로 뭘 할까. ‘아름답고 유용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 되자’는 어릴 적 꿈을 되새겼다. 2013년부터 수공예 생산자 플랫폼 ‘소생공단’을 운영하며 다양한 장인들과 소비자들을 연결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망했다. “회사를 운영하던 시절 실패해 본 적 없어서 자신만만하게 큰 투자를 했는데, 장렬하게 실패”했다. 회복하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다만 이 과정에서 전통목수학교에 다니고 소목장인의 기술을 배워 직접 다양한 목재로 가구를 만들어 본 경험이 그를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이정혜 도잠 대표. ⓒ이세아 기자
이정혜 도잠 대표. ⓒ이세아 기자
이정혜 도잠 대표. ⓒ이정혜 대표 제공
이정혜 도잠 대표. ⓒ이정혜 대표 제공

체력이 약한 목수도 어렵지 않게 만들어 합리적인 가격에 팔 수 있는 가구를 만들고자 했다.

“제가 원래 몸이 약해요. 통나무를 떠메고 와서 대패질하는 전통적인 목공 작업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어요. 그렇다고 설계만 하고 제작은 외주를 주면 소비자에게 설득력 있는 가격을 책정하기가 어렵고요. 엄청난 고민과 시행착오를 거쳤죠. 팔지도 못하는 가구들을 떠안고 물류비만 내기도 했고요.”

합판에서 답을 찾았다. 저렴하고 구하기 쉽고 튼튼하지만, 가시가 많고 습기나 온도 변화에 취약한 자재다. 다들 안 된다며 말렸다. 잠수함 내장재로 쓰이는 특수 합판을 찾았다. 물에 강하고 단단한 9mm 두께의 이 특수 합판으로 모듈 가구를 만든다. 못이나 나사 없이 조선 전통 목가구 방식으로 짜맞춘다. 요즘은 합판 가구를 쉽게 찾을 수 있지만, 2016년 브랜드 런칭 당시만 해도 도잠의 기술은 독보적이었다.

“저희처럼 가구를 만들 수 있는 업체는 어디에도 없다고 자부해요. 지금도 일일이 합판 두께를 재고, 어느 방향의 나뭇결이 예쁜지, 유격 하나까지 꼼꼼하게 살펴서 가구를 만들어요. 특별히 광고도 할인도 하지 않지만 손님들은 그 차이를 알고 돌아온다고 생각해요.”

도잠의 ANZA 테이블. ⓒ도잠
도잠의 ANZA 테이블. ⓒ도잠
도잠의 OLIDA 모듈러 테이블. ⓒ도잠
도잠의 OLIDA 모듈러 테이블. ⓒ도잠

도잠의 가구들은 따뜻하고 친근하다. 묵직하고 차분한 색, 수수하고 간결한 형태가 질리지 않는다. 눈에 띄는 화려함은 없지만 그래서 마음 놓고 정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최소한의 재료로 군더더기 없고 정갈한 형태를 유지한다”는 원칙을 지킨다. E0 등급 친환경 접착제를 사용해 인체 유해성도 최소화하려 했다.

“못이나 나사를 쓰면 언젠가는 나무가 삐걱거리며 뱉어내더라고요. 플라스틱 등 소재와 결합해 새로운 느낌을 줄 수도 있겠지만 분리배출이 어렵고요. 저절로 흙으로 돌아가는 가구를 만들고 싶어요.”

모든 가구는 주문제작하며 보통 제작에 2~3주가 걸린다. 대량생산 기업들의 빠른 속도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이 ‘너무 느리다’며 불평하기도 하나 소량생산 원칙을 지키려 한다.

“일단 많이 만들어 뒀다가 안 팔리면 버려야 하니 마케팅에 몰두하게 되죠. 그보다는 오랫동안 쓸 수 있는 좋은 가구를 그때그때 조금씩 만든다는 정공법을 택했습니다. 무리하지 않고, 먹고 살고 아이 키우고 다시 회사에 투자할 정도만 벌어요. 주문이 줄어들면 마음이 콩닥거리긴 하지만, 도잠 같은 방식의 생존도 나름대로 의미 있지 않을까요.”

도잠의 OLIDA 모듈러 테이블. ⓒ도잠
도잠의 OLIDA 모듈러 테이블. ⓒ도잠
도잠의 DONGNE 의자와 MAZU90 2인용 식탁. ⓒ도잠
도잠의 DONGNE 의자와 MAZU90 2인용 식탁. ⓒ도잠

‘여성’은 도잠의 정체성이다. 여성의 힘만으로 쉽게 옮길 수 있는 가구, 뾰족한 모서리나 거친 면 없이 손 닿는 모든 곳이 부드러운 가구를 만든다. 손잡이를 달거나 힘주어 미는 것만으로 쉽게 옮길 수 있게 하는 식이다. 가벼운 합판 소재를 쓰는 이유와도 연결된다. 아이를 낳고 기른 경험이 큰 영향을 줬다.

“육아는 제가 해 본 어떤 일보다도 힘들었어요. 동시에 많은 깨달음을 줬죠. 예전엔 실험적이고 흥미로운 가구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는데,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편안하게 쓸 수 있는 디자인, 삶에 스며드는 디자인을 고민하게 됐어요.”

여성들이 직접 설계하고 만든다. 여성 미술작가들로 구성된 작업 공동체 ‘도잠이’다. 현재 7명이 서울 영등포구 작업장에 모여 함께 일한다. 감각이 좋은 사람들끼리 일하니 시너지 효과가 난다. 결원이 생기면 여성 작가 커뮤니티에 채용 공고를 낸다.

“윈윈이죠. 작가들 입장에서는 돈도 벌고, 작업 생각에 머리 아프다가도 일하면서 기분 전환도 하고, 지원사업 정보도 주고받고요. 벌써 6년째 함께하는 친구도 있어요. 거창한 여성운동이라기보다는 제가 여성으로 살면서 느낀 것들,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브랜드에 녹아든 것 같아요.”

자신이 여성인 게 참 좋았다. 그걸 알리고 싶었다. 특히 엄마가 되면서 달라진 생각을 가구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작은 목소리지만 다른 여성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해요. 여성들이 스스로의 아름다움, 다름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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