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피해자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
[친족 성폭력, 그 이후의 삶 ⑤] 피해 말하기까지 10년 이상 걸려 21대서 15개 법안 쏟아졌으나 폐기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낮 12시, 서울 광화문 앞에 모이는 이들이 있다. 친족 성폭력 생존자이자, ‘친족 성폭력을 말하고 공소시효 폐지를 외치는 단단한 사람들’(공폐단단) 활동가들이다. 이들은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해 2021년부터 광장에 나왔다.
“8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10년 이상 성폭력을 당했지만, 성폭력이라고 인지한 것은 30여 년이 지나고 나서였다.” 공폐단단 시위에 처음부터 함께한 친족 성폭력 생존자 푸른나비(활동명, 50대)가 말했다.
10년간 지속된 성폭력으로 그의 청소년기 기억은 중간중간 사라졌다. 푸른나비가 성폭력 사실을 마주하게 된 건 2008년 조두순 사건 때문이었다. 그는 “40대 때 조두순과 아버지가 한 행위가 똑같다는 걸 알았다. 그제야 내가 겪은 게 성폭력이구나 하고 깨달았다”며 “예전에 아이를 때려도 사랑의 매, 훈육이라고 했던 것처럼, 그 행위가 성폭력이라는 것을 인지하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다른 친족성폭력 생존자 김민지(30대)씨 역시 피해 사실을 인지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김씨는 “7살 때 사촌 오빠에게 성폭력을 당했다. 당시 불쾌하고, 뭔가 부모님에게 들키면 혼날 것 같다는 감각은 있었지만, 그게 성폭력이라는 건 초등학교 5학년 때 성교육을 듣다가 알게 됐다”고 했다.
피해를 말하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김씨는 “열아홉살 때 처음으로 엄마에게 털어놓았지만, 돌아온 건 왜 이제 와서 이야기하냐는 답이었다”고 말했다. 22살 이후 다시 친족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 고소를 알아봤지만,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후였다.
친족 성폭력은 매년 300건 이상 발생한다. 여성가족부가 지난 5월 발표한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발생 추세 및 동향 분석’에 따르면 2014∼2022년 9년간 총 2813건의 친족 성범죄가 발생했다. 지난달 21일 국회입법조사처 발표에 따르면 미성년 친족 성폭력 피해자의 79%는 13세 이하, 36%는 10세 이하였다.
성폭력 피해의 상당수가 어린나이에 발생하다 보니 생존자들은 피해를 인지하고 알리는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친족성폭력 피해자 중 사건 발생 이후 상담까지 10년 이상 걸린 경우가 55.2%였다. 57.9%는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시점에 상담을 신청했다.
생존자들은 친족 성폭력의 이같은 특성을 고려해 공소시효를 폐지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현행법상 친족성폭력 공소시효는 최장 10년이다. DNA 증거 등 죄를 증명할 수 있는 과학적 증거가 있을 때 10년 연장해 20년까지 늘어날 수 있다. 단, 2011년 관련법이 개정돼 사건 당시 피해자가 13세 미만인 경우에 한 해 공소시효가 폐지됐다. 나머지의 경우 피해자가 성인이 된 날로부터 10년이 지나면 공소시효가 소멸한다.
김씨는 “피해는 사라지지 않는다. 생존자들 중 가해자랑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보거나, 비슷한 장소에 가면 몸이 본능적으로 굳는 사람들이 있다. 이처럼 피해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하지만 왜 가해자에게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처벌받지 않도록 시효를 두나”라고 지적했다.
푸른나비 역시 “공소시효 폐지는 피해자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이라며 “아무리 시간이 지나더라도 생존자가 사건 해결을 원한다면 해결할 수 있게끔 법적으로 허용하는 것이 공소시효 폐지”라고 설명했다.
친족 성폭력 생존자들의 간절한 외침에도 법제도의 변화는 더디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소병철 민주당 의원과 양정숙 무소속 의원이 각각 친족 성폭력 범죄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내용의 법을 발의했다. 이외에도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연장 및 피해자 지원 관련 개정안이 총 15개의 발의됐지만 모두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22대 국회에도 친족 성폭력 관련 발의는 이어지고 있다. 국회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8월 21일 기준 친족성폭력 관련 법안은 6개가 발의됐다. 정춘생 조국혁신당 의원은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개정안과 친족 성폭력 피해 아동들이 보호시설 퇴소 후 자립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개정안 등 총 4개의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종배 국민의힘 의원은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를 10년 연장하는 개정안을, 김승수 국민의힘 의원은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를 15년 연장하는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편집자주] 성폭력은 사건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성폭력 신고 이후의 지난한 과정은 성폭력의 다른 얼굴이다. 친족 성폭력의 경우 지지기반이어야 할 가정에서 가해가 발생하기에 피해자는 더 큰 고통과 배신감, 상실감을 느낀다. 가해자를 이해하고 싶고, 나만 참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마음이 올라온다. '집'을 잃는 일은 무섭기 때문이다. 게다가 친족 성폭력은 피해자가 어리고, 수년간 가해가 지속된다는 특징을 갖기에 더더욱 폭로가 어렵다.
하지만 주위의 도움으로 가정에서 벗어난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이 있다. 탈가정을 한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여성신문은 친족 성폭력 사건 이후의 삶에 주목한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이 시설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시설을 퇴소 후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따라간다.
① 자립수당 못 받는 친족성폭력 피해자, ‘홀로서기’ 지원해야
③ ‘가족문제’ 되는 오빠 친족 성폭력… “별 일 아냐” 부모 말에 피멍드는 피해자
④친족성폭력 피해자도 자립지원금 받을 수 있게 된다… 정춘생, 법안 발의
⑤“공소시효 폐지는 피해자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