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자 환경부 장관
2005-05-12 여성신문
지난 6월 24일 ‘전경련 2만달러 격려금’ 파문으로 물러난 손숙
장관의 뒤를 이은 김명자 환경부 장관. 그동안 ‘업무 파악중’이라
는 이유로 일체 인터뷰를 미뤄온 김 장관이 취임 50여 일 만인 지난
8월 9일 환경·여성전문지를 대상으로 처음 공동인터뷰를 했다.
차분하고 온화한 이미지의 김장관은 인터뷰 내내 상당히 여유있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온건하면서 완벽주의자라는 평판대로 정
확한 답변에 무척이나 신경을 쓰면서 정성을 다하는 모습은 확실히
눈에 띄는 대목이었다. 김 장관은 이날 “그동안 추진해온 업무들에
나름대로 만족한다”는 소감을 피력했으며 “앞으로 혼신의 힘을 다
하겠다”는 각오도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취임후 가장 중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는 시책은 무엇입니까.
“큰 예산을 들이지 않고도 국민의 참여를 이끌어 내 환경문제를 해
결해나가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절수운동 같은 거에요. 환경문제해
결에 기여할 수 있는 사업을 체계화하고 조직화해 정책효과를 극대
화할 수 있는 시책 개발이 가장 우선입니다. 그리고 신규 천연가스
버스사업과 같이 예산투입이 필요한 사업에 대해서는 최대한 역량을
모으고 이러한 사업의 예산집행 효율성을 높일 계획이에요.”
-최근 김 대통령은 동강댐 반대의견을 피력하셨는데 장관님은 어떤
입장이신가요.
“현재 한국수자원공사에서 환경영향평가에 필요한 추가 정밀조사를
관련 전문가와 함께 수행중에 있습니다. 각종 조사가 마무리되고 건
교부로부터 보완자료가 제출되는대로 조속히 환경영향평가의 결론을
내리도록 할 계획입니다.”
-개인적으로 장관님의 환경철학이 궁금합니다.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접근은 물질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절제와 중용을 중시하는 가치관으로 전환하는 일입니다. 그
간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과학기술적, 사회경제적 접근은 그 한계가
분명히 드러났다고 보거든요. 덜쓰고, 다시쓰고, 나눠쓰는 것이 체화
하고 실천돼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유명 여성인사들이 살아가기가 참 힘들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요, 장관님은 지난 50일간 어떠셨나요.
“이 자리에 오면서 제가 유명해졌죠(웃음). 개인적인 자유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 좀 달라진 거 같아요. 예전처럼 단골가게 들르는 일
도 쉽지 않고, 행동들이 확실히 예전같지 않거든요. 그런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장관이 되고 나서 가장 달라진 게 저의 머리라고 이
야길 하더라구요. 교수 때는 라면머리였는데 지금은 그에 비하면 많
이 차분해졌다는 거에요(웃음)”
-임명 소식을 처음 들었을 당시에는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당시에도 참 일이 많았고 바빴어요. 국가기술자문위원에다 시민단
체 일도 상당히 많았고 정부 위원회에도 여러곳 속해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일많고 바쁜 생활에 충분히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런 상황에
서 임명 소식을 들었는데, 어찌됐든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었
어요.”
-마지막으로 여성계에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솔직히 제가 워낙 여러 일들을 맡다보니까 여성계가 원하는 만큼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어요. 그런데도 여성계가 저에게 보내준 격려
와 지지를 생각하면 너무 고마울 따름입니다. 앞으로 저 개인적으로
는 여성계의 한 사람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생활할 거에요. 앞으로도 많이 지원해주시고 또 도움말도 많이 주셨
으면 합니다.”
'최진숙 기자 jinschoi@womennews.co.kr'
김명자 장관
소위 'KS마크'로 일컬어지는 경기여고-서울대(화학과) 출신의 김
명자 장관은 정통 엘리트 코스만을 밟아온 인물이다.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스물일곱 나이에 초고속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74년
서른두살의 나이에 숙명여대 화학과 교수가 됐다.
과학기술분야에서 여성으로서는 보기드물게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장관이 되기전까지 대통령이 위원장인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을 지내왔을 뿐만 아니라 과학기
술분야 저술활동도 탁월한 편에 속했다. '동서양의 과학전통과 환경
운동', '현대사회와 과학' 등의 저서와 번역서 '과학혁명의 구조' 등
20여 권을 펴냈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84년에는 한국과학저술협회
가 수여하는 제1회 저술상을 받은데 이어 94년에는 대한민국과학기
술상 진흥부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상은 당시 최연소이자 최초
여성수상자라는 점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경력
을 감안해 언젠가는 그가 과기부 장관에 오를 것이라는 이야기도 물
밑에서 나돌았다.
김 장관이 활발히 저술활동을 펼친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김 장관의 아버지는 성균관대 대학원장과 예일대
교환교수를 지낸 영문학자 김재근씨. 경기여고 동창 가운데 한명은
“화학과를 선택할 줄 정말 몰랐다. 아버지를 닮아서 글쓰기를 좋아
해 인문계를 지망할 줄 알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서울대 화학과 동기와 결혼한 김 장관은 ‘전통적인 여인의 삶’을
그의 ‘가정관’으로 삼았던 것 같다. 김 장관은 "참고, 견디며, 극
복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인터뷰 중간 털어놓으면서 세 아이
의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며느리로서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사실 김 장관은 결혼한 지 얼마 안돼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나란히 간경화 합병증과 당뇨 등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10여 년간 모든 병수발을 책임지기도 했다.
하지만 가정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김 장관은 3년전 이혼의 아
픔을 겪었다. 김 장관은 당시를 “그저 운명이었다, 살기 위해 선택
한 것이었다”고 회고한다. 이혼 경력은 장관직에 오른 직후 언론의
입방아에 오르게 했는데, 갑작스레 전화를 걸어온 기자가 경황없이
남편의 직업을 묻자 “해당사항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무직’
으로 와전됐고, 그후 언론에서 김 장관이 고의로 이혼사실을 숨기려
한 것처럼 보도하면서 김 장관은 적지않은 마음고생을 했던 것이다.
김장관은 “저의 아이큐가 두자리입니까? 요즘 모든 정보가 다 공개
돼 있는데, 어떻게 그런 걸 숨기겠어요”라고 반문한다. 김 장관은
어려운 시기였지만 이혼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걸 배웠다고 털어놓
았다. 실패를 인정하기까지는 참 힘들었지만 그런 일을 겪으면서
“진정한 겸손을 배웠다”는 것이 김 장관의 솔직한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