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위기, 이제 클래식 중심은 한국” 영국 거장 허프 경의 확신

신작 협주곡 22일 롯데콘서트홀서 아시아 초연 ‘30년 지기’ 함신익의 심포니송과 협연 “유럽, 전통의 자신감 잃어... 한국 연주자·관객 열정에 감탄 나는 시인의 충동으로 사는 사람 정열만큼이나 일상의 여백 중요”

2025-11-22     이세아 기자
영국 클래식 피아니스트 스티븐 허프 경이 지난 18일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문화체육회관에서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심포니송 제공

“클래식 음악은 유럽과 미국에선 위기지만, 한국에선 완전히 안전합니다. 50년 후엔 이곳이 완전히 중심이 될 겁니다. 모두가 한국에 와서 공부할 거예요. 한국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청중이 있습니다. 젊고, 열정적이고, 훌륭한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최고의 관객들이죠.”

22일 롯데콘서트홀 무대에 서는 영국 거장 스티븐 허프 경은 단언했다.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이코노미스트’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 20인’ 중 유일한 음악가다.

그는 한국을 “세계 최고의 공연 장소 중 하나”로 꼽는다. 2007년 첫 내한 이후 통역 없이 활동할 정도로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매니저가 ‘한국 공연이 잡혔다’고 할 때마다 ‘오 좋아!’ 외친단다.

이번 공연에서 그는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어제의 세계(The World of Yesterday)’ 아시아 초연을 직접 연주한다. 지휘는 30년 지기 함신익 심포니송 예술감독이, 연주는 젊은 음악가들로 구성된 심포니송 오케스트라가 맡는다. 함 감독은 “이 작품은 에너지와 흥분으로 가득하다. 젊은 연주자들이 연주하기에 딱 맞다”고 말했다.

바스크 민요 ‘성녀 아가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허프의 관현악곡 ‘아가타(AGATA: a Basque Fantasy for Orchestra)’, 낭만주의 피아노 협주곡의 대표작, 그리그의 a단조 협주곡도 들려준다.

함신익과 심포니 송 마스터즈 시리즈 IX ‘스티븐 허프 경’ 포스터. ⓒ함신익과 심포니 송 오케스트라 제공

두 사람의 인연은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그린베이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첫 시즌을 맞은 함 감독이 허프를 초청했고, 멘델스존 협주곡 연주에서 “기교를 넘어선 진심”을 발견했다. 함 감독이 보는 허프는 음악적 깊이뿐 아니라 “철학과 종교적 접근, 역사에 대한 이해가 탁월한 예술가”다.

허프도 6년 전 심포니송과의 첫 만남을 잊지 못한다. “처음부터 인상적이었어요. 나이 든 프로 연주자들 중에는 연습을 지루해하거나 큰 흥미를 보이지 않는 이들도 있죠. 하지만 여기선 모두가 진심으로 연주하고 싶어 했고 열정적이었어요.”

‘어제의 세계’는 원래 영화음악 프로젝트였다. 제작사 사정으로 무산되면서 공연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으로 재탄생했다. 제목은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회고록에서 빌려왔다. 허프에겐 “모차르트부터 베토벤, 라흐마니노프 등 피아노를 치는 작곡가라면 피아노 협주곡을 쓰는 게 당연했던 ‘어제의 세계’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다.

함신익 심포니송 예술감독과 영국 클래식 피아니스트 스티븐 허프 경이 지난 18일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문화체육회관에서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심포니송 제공

그러나 오늘날 ‘클래식 본고장’ 유럽은 흔들리고 있다고 본다. “클래식 음악이 과거를 대표한다고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이죠. 아시아와는 달리 전통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어요. 심지어 그게 뭔가 나쁘다고 느끼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것저것 공평하게 다뤄야 한다, 베토벤이 있으면 롤링스톤스도 똑같은 비중으로 다뤄야 공평하다는 식입니다. 모든 것을 평등하게 만들려는 잘못된 감각이에요. 이 모든 것을 검토해야 한다는 큰 압력이 존재합니다.”

허프가 추구하는 음악은 명확하다. “제 눈에 눈물이 고이는 음악을 좋아합니다. 청중과의 감정적 연결을 원합니다. 공연장을 떠나는 길에도 여전히 떠오르는 음악을 선사할 수 있다면 그게 성공한 음악이죠.” 다만 음악가가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일에는 신중하다. “음악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니까요. 나는 모든 사람이 콘서트에서 환영받는다고 느끼길 원합니다.”

피아니스트, 작곡가, 작가, 교육자.... 허프가 다채로운 활동을 이어가는 원천은 “시인의 충동”이다. “단어를 넘어서, 의미뿐 아니라 암시와 함축까지 도달하고 싶은 욕구”다.

“인간은 누구나 시인입니다. 시는 평범함 너머의 무언가를 보는 일이지요. 슈퍼마켓에서 일하면서도 시인일 수 있어요. 스타성이나 천재적 재능과는 무관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불꽃을 품고 있습니다. 그 불씨를 피워 올릴 자신감이 필요할 뿐이죠.”

내면의 열정만큼이나 일상의 여백을 소중히 하는 예술가다. “매 순간이 일로 가득 차 있다고 느끼고 싶지 않습니다. 공간이, 침묵이 필요해요.” 1983년 나움버그 콩쿠르 우승 후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지만, 9개월 뒤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얼마나 많이 일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매일 일어나면 여행하고 연주하는 일을 반복했어요. 점점 지쳐간다는 걸 깨달았을 땐 너무 늦었죠.”

그러니 “과로하지 말라”고 그는 조언한다. 임윤찬 같은 젊은 스타 연주자들이 겪는 스트레스와 압박감에 대해서도 그는 우려한다. “모든 콘서트가 스트리밍되고, 녹음되고,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이대죠. 대중 앞에 서는 일은 건강에 매우 해로울 수 있으니 조심하면 좋겠습니다.”

연주와 작곡 중 무엇이 더 매력적일까. “작곡엔 많은 고생과 고통이 따르지만 완성하면 끝나죠. 일단 세상에 나가면 더는 제 것이 아니지요. 해안을 떠난 배를 되돌릴 수는 없듯이요. 하지만 연주에는 끝이 없어요. 매일 아침 일어나서 ‘몸이 풀렸나? 이 곡을 기억할 수 있나?’ 반복합니다.”

신곡 작업에도 한창이다.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텍스트를 영어로 사용하는 곡이다. “산 자를 위한 레퀴엠”이다. “죽음을 바라보는 방식이자, 위로를 찾는 길이죠. 우리 모두가 마주하는 일이니까요.”

함신익 예술감독과 심포니송 단원들. ⓒ심포니송 제공
함신익 심포니송 예술감독. ⓒ심포니송 제공

다음 세대를 위한 오케스트라, 심포니송

2014년 창단, 올해 11주년을 맞은 심포니송은 “민간기업과 개인들이 후원자인 동시에 주인이 되는 오케스트라”를 표방한다. 젊은 유망 연주자들을 단원으로 선발해 프로로 활동할 기회를 제공해 역량을 향상하도록 돕는다. 전국의 문화예술 소외지역을 찾아가는 사회공헌 활동 ‘더 윙(The Wing)’ 프로젝트도 이어오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우수전문예술단체 선정, 한국메세나협회 베스트 커플상 수상 등으로 공로를 인정받았다.

함 감독은 “앞으로 환경은 더 어려워지겠지만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며 “언젠가는 심포니 송만의 공연장을 마련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젊은 음악가들이 마음껏 연습하고 성장할 수 있는 공간,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을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겠다는 포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