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10조 투자, 성평등 관점 더해야 ‘완성’

10조원 중 성평등 예산 ‘0원’ AI 인재 양성, 다양성 목표 설정 필요 6조원 ‘피지컬 AI’도 제조업·중공업 넘어 돌봄·사회 분야로 확장 필요 공공 AI, 성평등 영향평가 도입해야

2025-11-21     이세아 기자
ⓒChatGPT

정부가 2026년 인공지능(AI) 분야에 역대 최대인 10조 1000억원을 투입하는 예산안을 편성했지만, 이 중 성평등이나 젠더 편향 개선에 배정된 예산은 한 푼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AI 인재 3만 8000명 양성’ 계획에도 성별 목표치가 제시되지 않았다. 5년간 6조원을 투입하는 ‘피지컬 AI’ 5대 분야는 로봇·자동차·조선·반도체·가전 등 전통적 남성 중심 제조업에만 집중돼 있다. 전문가들은 “AI 기술이 모든 시민에게 공정한 혜택을 가져오려면 지금부터라도 성평등·다양성 관점을 정책 설계에 포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10조원 중 성평등 예산 ‘0원’

지난 8월 29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26년 예산안’ 분석 결과, AI 분야 총 10조 1000억원 중 성평등이나 AI의 젠더 편향 개선을 명시적 목표로 하는 예산은 확인되지 않았다. 전년 대비 206% 급증한 대규모 투자지만, 여성의 AI 분야 참여 확대나 알고리즘 공정성 같은 성평등 의제는 아직 정책 우선순위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AI 인재 양성, 다양성 목표 설정 필요

정부는 AI 인재를 2025년 8000명에서 2026년 3만 8000명으로 대폭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AI·AX 대학원을 19개교에서 24개교로 늘리고, ‘AI 마에스트로’ 프로그램 참여자를 110명에서 450명으로, ‘AI·이노아카데미’는 300명에서 1200명으로 각각 확대한다. 하지만 여성 참여 비율 목표나 성별 균형 방안은 제시하지 않았다.

신설되는 ‘Top-tier AI 융복합 과정’도 1만명을 육성한다는 계획만 있을 뿐, 이공계 여성 인력 확대 전략은 찾아볼 수 없다. 청년일자리 도약장려금(9080억원)이나 청년미래적금(7446억원) 등 청년 지원 예산도 성별 구분 없이 편성됐다.

성별로 본 우리나라 과학기술분야 연구개발 인력 추이 (2011~2022). ⓒWISET 제공

6조원 ‘피지컬 AI’, 제조업·중공업 넘어 돌봄·사회 분야로 확장해야

정부가 5년간 6조원(2026년 4862억원)을 투입하는 ‘피지컬 AI’ 중점사업 5개 분야는 △AI 로봇 △AI 자동차 △AI 조선 △AI 가전·반도체 △AI 팩토리. 모두 남성 고용 비중이 높은 제조업과 중공업 중심이다.

생활밀접형 제품 300개의 AI 전환을 지원하는 ‘AX-Sprint 300’ 사업(8920억원)도 제조업 중심이다. 바이오헬스나 돌봄·교육 같은 여성 고용 비중이 높은 분야는 후순위다.

AI 대전환을 위한 지역 거점 사업도 마찬가지다. 광주(에너지·모빌리티, 240억원), 경남(기계·부품 가공, 400억원), 전북(AI 팩토리, 400억원), 대구(로봇·바이오, 198억원), 대전(버티컬 AI, 1594억원), 부울경(해양·항만, 370억원) 등 6개 권역 모두 제조·중공업 중심이다.

향후 헬스케어 AI, 교육 AI, 돌봄 로봇, 사회서비스 자동화 같은 분야로까지 확장된다면 여성 비중이 높은 산업으로도 AI 투자가 늘어나 성평등과 산업 경쟁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일본은 ‘개호(간병) 로봇’ 개발에 적극 투자하면서 간호·요양 분야 여성 인력의 AI 기술 접근성을 높이고 있다. 

원민경 성평등가족부 장관이 18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장애인 성희롱·성폭력 대응·방지를 위한 관계부처 회의를 개최해 사건 방지 및 대응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성평등가족부

성평등가족부 데이터 역량도 높여야

AI 대전환 시대 국민 생활을 결정하는 중앙부처의 데이터 분석·활용 역량도 지금보다 높여야 한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정태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행정안전부로부터 제출받아 지난달 공개한 ‘2024년 기관별 데이터 역량 진단’ 결과를 보면, 성평등 정책을 담당하는 성평등가족부(옛 여성가족부)는 48.4점으로 신설 부처인 재외동포청을 제외하고 중앙부처 중 최하위였다. 알고리즘 편향, 디지털 성범죄 등 새로운 성평등 의제에 대응해야 하는 무거운 소임에도, 데이터 역량은 아직 평균 이하인 셈이다. 

기획재정부(58.4점)와 과기정통부(59점)도 전체 공공기관 평균(57.1점) 수준이었다. 특히 데이터를 실제 분석·활용하는 ‘개인 역량’이 취약했다(기재부 54.1점).

다만 정부가 공공 AX 프로그램 1000억원 등 이미 공공부문 AI 교육 예산을 대폭 늘렸고, 이를 체계적으로 운영한다면 빠른 역량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공무원 데이터 교육에서 젠더 통계 분석, 알고리즘 편향 점검 같은 모듈을 포함한다면, 정책 기획 단계부터 성평등 관점이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다. 

전문가들은 성평등가족부가 ‘AI 성평등센터’ 같은 전담 조직을 갖추고, 데이터 과학자·AI 윤리 전문가를 충원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부처 역량 강화뿐 아니라 범정부 AI 정책에 성평등 관점을 주류화하는 지렛대가 될 수 있어서다. 

여성 예산, ‘돌봄’ 집중...기술 연계 정책 필요

내년도 예산안에서 현재 여성 관련 예산은 저출생 대응(62.6조원→70.4조원)에 집중돼 있다. 동수당 확대(1.9조원→2.5조원), 아이돌봄 지원(0.5조원→0.6조원),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급여 인상 등이다. ‘주 4.5일제’ 도입 지원(277억원)이나 ‘육아기 10시 출근제’(31억원) 같은 일·가정 양립 예산도 편성됐지만, 여성의 AI·기술 분야 진출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는 보이지 않는다. 모두 중요한 정책들이지만, 여성을 ‘돌봄 제공자’로만 상정한다는 한계가 있다. 

돌봄과 기술을 연결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경력단절 여성의 디지털 전환 직종 재교육 지원, 육아휴직 중인 여성 대상 온라인 AI 교육 제공 등을 늘리면 여성의 생애주기별 필요와 기술 역량 강화를 동시에 충족할 수 있다. 

공공 AI, 성평등 영향평가 도입해야

정부는 공공 AX 프로그램 1000억원, 대국민 편의 370억원 등 공공부문 AI 전환에 2조원 이상을 투입할 예정인데, 기존 사회적 편향을 답습하지 않는 공공 AI 구축이 중요하다. 복지 정책 알고리즘이 여성 가구주나 한부모 가정을 불리하게 평가하거나, 채용 AI가 여성 지원자를 배제하는 사례가 해외에서 보고된 바 있다. 

공공 AI 성평등 영향평가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캐나다는 ‘알고리즘 영향평가(Algorithmic Impact Assessment)’를 통해 모든 공공 AI에 대해 성별·인종·장애 등 편향 여부를 사전 점검하고 있다.

정부 내에서도 수년째 지적 반복

정부가 ‘AI 3강 국가’를 목표로 한다면, 그 기술은 절반의 시민을 배제하지 않는, 진정으로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정부 내에서도 수년째 반복해서 제기된 지적이다. 여성가족부는 2020년 특정성별영향평가를 통해 AI의 성차별과 인권침해 문제에 대해 경고하고, AI 기술 연구·전문인력 양성 정책 개선을 권고했다. 당시 여가부 평가 결과, AI 사업 추진 기업의 소프트웨어 전문인력 중 여성 비율은 19.1%에 불과했고, 기업 대표자 중 여성은 3.1%에 그쳤다. ‘이루다 챗봇’의 여성·장애인 혐오 발언 논란도 개선 과제로 지적됐다. 여가부는 AI 학습용 데이터 기획·구축 과정에서 성별 다양성을 반영하고, 산업계와 학계가 구체적인 윤리 기준을 마련하며, AI 분야 인력의 성별 현황 관리와 균형 참여를 확대하라고 권고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AI 악용 범죄가 늘고 있어 사전적 대응체계 구축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올해 8월까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접수된 디지털 성범죄 신고 건수만 7023건에 달한다. 

또 AI가 편향된 결정을 내릴 경우 국민의 인격권, 평등권, 사생활 자유 등 기본권에 직접적 피해를 줄 수 있다고 경고해 왔다.  앞서 2024년엔 총 4단계 72개 문항으로 구성된 ‘AI 인권영향평가 도구’를 마련하고, 공공기관이 개발·활용하는 모든 AI와 민간 부문의 고위험 AI에 대해 자율적 인권영향평가를 실시하도록 권고했다.

2023년 3월 9일 국회 앞에서 열린 '인공지능산업 육성에만 초점 맞춘 법안 반대한다, 과방위는 인공지능법안 전면 재검토하라' 기자회견 현장. ⓒ참여연대 제공

인공지능기본법 실효성 더해야

내년 1월 시행을 앞둔 ‘인공지능기본법’(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에 성평등과 인권 관점에서 차별·폭력을 예방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조항을 추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안진현 인권위 사무관은 인권위, 주한유럽연합대표부(EU), 아시아태평양국가인권기구(APF) 주최로 지난 9월 열린 ‘신기술과 인권 – 인공지능의 기회와 도전’ 국제 콘퍼런스에서 네 가지 핵심 과제를 권고했다. 첫째, 공공부문 AI와 민간부문 고위험 AI에 대한 인권영향평가를 법적 의무로 도입해야 한다. AI의 불투명성과 자율성으로 사후 구제가 어려운 만큼 사전예방적 평가가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둘째, AI 위험성을 금지·고위험·제한적 위험·저위험 영역으로 구분하고 사업자 유형에 따라 규제를 세분화해야 한다. 셋째, AI로 인한 피해를 유형별로 분류하고 각 유형에 맞는 구제 절차를 법제화해야 한다. 넷째, AI 인권침해와 차별 문제를 실효성 있게 감독하기 위해 산업 진흥 기관이 아닌 독립적인 제3의 감독기관을 설치해야 한다.

EU AI법은 인종·성적지향 등을 추론하는 생체인식분류시스템, 취약계층 악용 AI, 사회적 점수 평가 시스템의 사용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데이터 거버넌스 규정을 통해 학습 데이터 품질 기준을 규율한다. 미국은 알고리즘 책임법으로 사전 영향평가를 의무화하고 연방통상위원회가 실효성을 보장하도록 했다. OECD는 AI 개발자들이 편향성과 불공정성 위험을 사전 분석하고 시정조치를 마련할 것을 권고하며, 이용자가 AI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설명을 요구할 권리를 보장할 것을 강조한다.

이권일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부교수는 “학습 데이터와 알고리즘 자체에 문제가 없더라도 사회의 편향성을 그대로 학습하는 경우가 있다”며 “AI가 본격 상용화되기 전에 강제적 규범이든 자율규제든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 12일 AI 안전·신뢰 확보를 위한 제도를 포함한 인공지능기본법 시행령 제정안을 마련, 내달 22일까지 입법예고 중이다. 또 2024년 11월 출범한 과기정통부 산하 ‘인공지능안전연구소’를 중심으로 AI 위험 관리를 강화하며, 미국·영국·일본 등과 국제 공조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